우리가 아니라, 상황이 먼저였다

스무 살의 선택은 준비 없이 찾아왔다

by 그릿 grit

임신은
계획이 아니었다.
그날은 특별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만났고,
평소처럼 헤어졌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달라졌다.
두 줄이 선명하게 떠오르던 날,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쁨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았고,
두려움이라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기분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내 목소리는 이상하게 차분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침묵이 먼저 왔다.
길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우리는
아직 스무 살이었고
각자의 방향도 완전히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라는 말을 막 꺼냈을 뿐인데
상황은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는 말했다.
“책임질게.”
그 말은
로맨틱하지도 않았고
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한 결심 같았다.
나는 그 말에
안도했는지,
겁이 났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엄마에게 말하던 날,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실망과 걱정과 분노가
한 번에 스쳤지만
그보다 먼저 보였던 건
내가 아직 아이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아이를 가졌지만
여전히 아이였다.
그날 우리는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결혼을 선택한 게 아니라
상황을 책임지기 위해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스무 살의 우리는
어른이 되려고 한 게 아니라
밀려서 어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선택이
전부 후회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두 줄이 떠오르던 날부터
내 삶은
혼자가 아니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