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면 두렵지 않다
모닝 독서 시간, 책 속 한 문장이 나의 기억을 과거 한 장면 속으로 이끌었다.
"비가 와도 괜찮다." 사실 제일 무서운 사람은 마음을 비운 사람이다. <을의 철학, 송수진>
한여름, 아마도 고3 여름이었다. 토요일이었을까. 매일 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걷던 시골길이 그날은 낮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집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걸어야 했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겐 우산이 없었다. 간신히 바로 앞 슈퍼마켓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다. '어쩌지?' 슈퍼마켓 주인아주머니께 조심스럽게 우산을 빌려볼까 했지만, 여분의 우산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그 비를 맞으며 그냥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민해 봤자 우산을 가지고 나와 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비는 순식간에 내 온몸을 적셨고, 교복은 살갗에 들러붙었다. 신발 안까지 완벽하게 모두 젖었다.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흠뻑 젖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비를 피할 필요도, 조심할 이유도 없었다. 이미 충분히 젖었으니까. 나는 뛰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묵묵히 1시간을 걸었다.
지나가는 차들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쌩" 하고 달려갔다. 처음에는 민망하고 비참하기도 했지만, 몇 대의 차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점점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냥 이 길을 지나야 하는 나와 자기 길을 가는 차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빗속을 걸어야 한다면, 그냥 맞고 걸으면 된다. 비를 피하기 위해 허둥대는 대신, 젖은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땐 몰랐지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삶의 많은 순간이 그 비 오는 길과 닮아 있음을 느낀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칠 때, 피하려고 애쓰는 대신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법을 나는 그때 배운 것이다.
비는 언젠가 멈추고, 젖은 옷은 마르며, 길의 끝은 도착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인생의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비가 와도 괜찮다."
마음을 비우면, 그 어떤 폭우도 나를 두렵게 할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