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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가라.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살림

2018년 8월 14일,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한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첫 소설을 출간한다.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담이 미국 출판계에 불러올 파장을 이때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작가 델리아는 이 책이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책'이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고립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그후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선정되고 아마존 판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다. 2019년 3월 4일, 100만 부 판매로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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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성장소설이면서 사랑, 추리소설적 요소, 환경에 대한 경각심,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 차별과 편견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다양한 생명이 숨 쉬지만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환경에 여섯 살 카야가 홀로 남겨진다.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는 집을 떠나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마을 사람들은 피하기만 할 뿐 작은 동정도 허락하지 않는다. 카야는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버림받고 또 사랑을 주었다 배반당하는 과정을 거치며 단단해진다. 단 하루 등교했던 학교는 카야에게 소외와 차별을 깨닫게 하는 곳일 뿐이었다. 카야의 고립은 카야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적 가정 환경, 경제적 계급, 신분, 인종 등의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회적 환경적 요인의 결과다.


정규 교육과정을 하나도 밟지 못했으나 정신적, 신체적으로 놀랄만한 성장을 이룬 것에는 테이트의 가르침과, 점핑과 메이블의 애정 어린 관심, 습지 생물들, 그리고 변화무쌍한 야생적인 습지가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카야를 길들여지지 않은 원초적인 습지로 은유하면 테이트와 점핑 씨는 습지를 돌보는 이들, 카야를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여겼던 체이슨 어쩌면 개발지 상주 의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결국은 카야가 체이슨을 소방망루에서 응징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으로 볼 때 습지를 개인의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하는 묵시적 경고로도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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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작가의 어머니가 평소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던 말씀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란 의미는 생물이 여전히 야성을 간직하고 수백 년에 걸쳐 살아온, 존재하고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책의 원문에 등장하는 ‘yonder’란 단어는 ‘여기’와 ‘저기’ 중간의 어디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나와 타인 사이 어딘가, 장소로 특정되지 않은 아주 먼 어딘가를 의미한다고 한다.

카야는 ‘yonder'의 거주민이었다. 글자 하나도 읽지 못하는 까막눈 카야가 테이트를 통해 문자를 알게 되고 책을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된다. 혼자 살아남기 위해 이른 새벽 누구보다 먼저 홍합을 채취해 점핑 아저씨의 가게에 가져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린 카야의 모습은 안쓰럽다. 혼자 남겨진 외로움은 점점 커져 카야가 품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잘 차려입은 또래 여자 아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카야, 거짓 결혼 약속으로 카야를 성적으로 유린한 체이스와의 관계에서도 카야는 순진하게 그와 더불어 세상 사람들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학위를 받으면 꼭 돌아오겠다는 테이트와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체이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방망루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밝혀진 체이스의 사체가 발견된 후 카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 대한 편견이 그대로 드러난다.˝습지에 사는 그 여자가 그랬을지도 몰라. 완전히 미친년이잖아. 얼마든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야 ….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습지에 살면서 베스트셀러가 될 책들을 내었고, 어멜다 해밀턴이라는 가명으로 지방 신문사에 시를 투고한 시인이기도 했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테이트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고 체이스를 스스로 응징하기도 하였으니...


이 책의 첫 문장은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로 시작된다.

P. 49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주었다.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P. 179 여기에는 윤리적 심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악의 희롱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른 참가자들의 목숨을 희생시켜 그 대가로 힘차게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 뿐이다. 생물학에서 옳고 그름이란, 같은 색채를 다른 불빛에 비추어보는 일이다.

P. 295 그 후로 책을 아주 많이 읽었어.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의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P. 448 혼자 지낸 건 그녀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다 야생에서 배웠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자연이 그녀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다. 그 결과 그녀의 행동이 달라졌다면, 그 역시 삶의 근본적인 핵심이 기능한 탓이리라.

P. 45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독특한 점은 소설가가 아닌 평생 야생동물학자로 살아온 70대의 델리아 오언스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 마시걸이라 불린 늪지 소녀 카야를 통해 보여준다. 살인사건 범인을 추적하는 현재의 이야기와 카야의 어린 날, 성장하는 날, 비로소 어른이 되는 날이 번갈아 서술되어 박진감을 준다.

판잣집에 혼자 남겨진 소녀가 소설이 아닌 현실 상황에서라면 뻔한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다. 버려지거나 유린되거나 밥벌이를 위해 스스로 타락하거나, 굶주려 죽거나...

한 사람의 성장에는 자기 안의 살고자 하는 에너지, 그리고 주변의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 숨을 쉴 수 있는 환경, 책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체이스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카야의 응징법에 공감하는 것은 체이스라는 인물이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고 계산적으로 다가서는,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속된 전형적인 물질주의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작가가 의도한 순수함을 바탕에 깔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통속적인 스토리가 적당히 잘 버무려있어서 미국 소설 특유의 상업적 요소도 가지고 있다. 어찌 되었건 자신의 환경, 어찌할 수 없는 선택 불가의 환경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견뎌내며 끝내 생을 개척한 카야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메마른 우리들의 가슴에 온기를 준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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