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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씨즐 SIZZLE 04화

화양연화

화양연화/ 꽃 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 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달프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 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 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화양연화/김사인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지칭한다. 정점에 다다른 아름다움의 끝은 내려가는 것 밖에는 없으니 ‘화앙연화’는 김사인의 시처럼 서글플 수밖에 없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감지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을 때는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지나고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 다녀갔음을 알게 된다. 삶이란 어쩌면 뒷북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순간은 행복인지도 모른 채 보내고 행복하지 않음의 순간이 오면 지난날이 행복이었음을 알게 되니 말이다.


손가락 사이로 무기력하게 빠져나가는 그 시간들 속에 벌써 머리엔 희끗희끗 눈이 내리고 눈가에 가늘게 고랑이 파였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하루하루 시들어 간다. 덧없고 속절없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중얼거린다. 예전엔 잘 어울리던 옷들이 이제는 겉도는 것을 실감한다. 생전 잘하지도 않던 마스크 팩이나 탄력 크림에 손이 가고 엘리베이터에 우연히 같이 탄 젊은 여인의 날씬한 몸매를 나도 모르게 흘끔거리게 된다.


한 때는 세상이 온통 연두이거나 핑크였던 때가 있었다.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 장화 탕탕 물장난 치던 지난날들이 있었다. 세상의 커튼이 열리지 않으면 그 커튼을 스스로 활짝 열어젖히면 된다고 생각하던 열정이 있었다. 아침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가 충분히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무엇을 듣든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보드랍고 친절했고 말랑거렸다.

돌아보고 기억하고 소환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내고, 그 어떤 날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그 모든 것들을 반추하면서 젊음의 정점에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나를 지탱하던 젊음의 시간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젊고 싶다.

그래도 어깨를 겯고 꽃 장화 탕탕 물장난 치고 싶다. 이미 벚꽃은 지고 연초록 잎이 돋았을지라도.

벚나무는 벚나무니까..... 나도 그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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