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부러지기 쉽다는 사실을 태풍이 지난 뒤 쓰러진 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 평생을 흔들리느니 강풍에 쓰러지더라도 마디 굵은 나무로 살고 싶었지만 늘 흔들렸던 시간들이었다. 해 그림자가 머리 위에 멈춘 시간, 아파트 놀이터의 빈 그네가 흔들리고 있다. 바람에 온 몸을 내어주는 그네에는 속삭임과 눈물, 웃음소리, 허무의 몸짓들이 묻어있다.
M은 사춘기를 함께 앓아온 친구였다. 걱정거리나 자랑거리가 생기는 날엔 둘 중 누구든 먼저 그네에 가 있었다. 걱정거리들을 그네 위에 얹어두고 홀가분하게 집으로 달렸던 밤들이 있었다. 어둠이 내린 그네에 M이 앉아 있었다. M이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얼핏 들었던 소문이 사실이었다. 가족 여행에서 돌아오던 길, 고속도로에서 맨 앞장을 서던 M의 부모님이 탄 차가 커다란 덤프트럭에 흡입되듯 빨려 들어갔다. 뒤따라가는 차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도 무언가에 홀리듯 끝없이 심연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M은 영화 속 한 장면을 바라보듯 기억하는 자신이 두렵다고 말했다.
그 밤, 그네 위에서 전해 듣는 죽음이 낯설었다. M은 부모의 죽음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일처럼 이야기했다. 휴게소를 다녀온 뒤 자신은 외삼촌 차로 옮겨 타 동승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그 모든 것이 운명이었는지를 잠시 생각 하는 듯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잖아.” 어둠 속에서 발화되는 내 목소리가 낯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미동조차 없던 M이 갑자기 일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라는 말이 상처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M은 ‘그래도 넌 부모가 있잖아.’ 그렇게 대꾸하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았는지 모른다,
그네 앞을 지날 때마다 M생각이 났다. 늦은 밤 일부러 그곳에 가보아도 M은 나오지 않았다. 서로의 동선을 잘 아는 M이 의도적으로 마주침을 피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가을의 초입, M이 살던 집이 팔렸다. 주인 잃은 이삿짐이 사다리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쓸모를 상실한 것들은 재활용 수거장 앞에 쌓여있었다. M에게 주었던 보름달 모양 야광 전등도 버려져 있었다.
기억 속에서 M은 서서히 잊혔다. 혼자 흔들리는 그네를 보면 우리의 흔들리던 시절이 떠오르곤 했다. 간호대를 다니다 휴학하고 의대를 갔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의대생이 된 M을 떠올리려 했지만 어둠 속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그네만 선명히 떠올랐다. 가끔 ‘그래도’로 시작하던 어설픈 위로가 M에겐 상처가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래도 우리 사이에 세월은 흘러갔고 그래도 M은 부모님이 살아계셨다면 대견스러워할 모습으로 자라났을 것이다.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던 나는 어느 해 봄, M의 청첩장을 받았다. 사춘기 때의 절친 M과 신부로서의 M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서로 다르게 퇴적된 시간들이었다. 몇 번의 단층과 습곡, 몇 번의 부정합층이 형성되었을까? 결혼식 무렵 M을 다시 만났다. 다른 친구들과 헤어진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아파트 놀이터 그네로 걸어갔다. 결혼식 전날 밤, M과 나는 무수한 시간을 돌아 마침내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오래전 M이 울 때마다 간간히 흔들리던 그네가 오늘은 M이 웃을 때마다 흔들렸다. 신랑은 같은 과 선배라고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M의 원피스가 하늘거렸다. 사고로 부모님을 잃어버린 그때 그 밤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애써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된 우리에게 예전의 기억은 단지 시간의 흔적일 뿐이었다. M과 나 사이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과장된 웃음으로 대처하려는 모습이 서글펐다. 서로 가슴에 담아둔 말들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였다. 늦은 밤 그네의 삐걱거림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핸드폰 번호도 알고 있었지만 그 후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았다. 촘촘한 시간은 쫓기듯 흘렀다. 느슨해진 시간이 찾아오면 그 때 다시 만나게 되길 바랐다. 그네에 꽃잎과 낙엽, 겨울 바람과 눈송이가 수시로 내려앉았다. 그네를 볼 때마다, 아이의 그네를 밀어줄 때마다 흔들림 속에 잊혀가는 M을 소환하곤 했다. M과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늦은 밤 카톡에 부고를 알리는 장례식장 메시지가 떴다. 기억에 없는 어떤 남자의 이름이었다. 유족 이름에 M이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 그네에서 만나자는 M의 메시지가 왔다. 사춘기를 보냈던 그곳에 검은 원피스 차림의 M이 먼저와 있었다. 우리들의 그네는 녹슬고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숱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다행히 철거되진 않았다. 그네가 흔들릴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거칠게 났다. 정말 아무 말도 묻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년이 된 우리 둘 사이로 그네만 혼자서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었다. M의 그네가 삐걱 소리를 내면 내 그네도 화답하듯 삐걱삐걱 울었다.
서로의 뒤에서 그네를 힘껏 밀어주며 까르르 웃던 지난날 누구 그네가 더 높이 오르는지 경쟁하듯 발을 구르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 시절엔 걱정이란 없었다. 손을 뻗으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잡히기라도 할 것만 같던 시간들이었다. 사춘기의 고민, 사랑, 죽음과 이별 같은 것들이 그네 위에 켜켜이 쌓였다. 그네에 앉아 발을 힘껏 굴러도 하늘까지 닿을 수 없으리란 걸, 새처럼 날 수 없다는 걸, 손을 뻗어도 원하는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린 나이였다. 티 없던 어린 소녀 둘이 중년 여인이 될 때까지 우리들의 그네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수시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흔들리고 싶지 않았던 우리도 세월의 바람 속에서 수시로 흔들렸다. 그래도 견디어내었고 강해져가고 있다. 우리와 함께 낡아간 그네가 삐걱거리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제는 삐걱삐걱 그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이라는 것을 나와 M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네 위로 별빛이 쏟아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