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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씨즐 SIZZLE 01화

씨즐(SIZZLE)

씨즐은 지글거리는 스테이크 소리다. 스테이크 맛을 보기도 전에 소리와 냄새는 우리를 사로잡는다.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후각을 자극하는 원두 향은 커피 맛을 상상하게 만든다. 소리와 냄새는 형체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 상태로 후각과 청각 기관에 도달하지만 우리는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지각한다.

씨즐은 청각과 후각만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달빛 걸음 차’(Moon walk tea), ‘동백꽃잎차’(Camellia tea)는 이름만으로 우리는 망막에 풍경화를 그린다. 어느 해 여름 부산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서 바라보던 동그란 달이 떠오르고 달빛 걸음으로 흐느적거리며 걷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동백꽃잎 차는 선운사 뒤뜰 새빨간 동백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던 정오의 풍경을 소환한다.


차를 마시기 위해 티백의 포장을 열면서부터 코를 킁킁거린다. 달빛 걸음 향기와 동백꽃 향기를 좀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서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투명 머그잔 안에서 삼각형 티백이 돛단배처럼 부유한다. 달빛이 찻잔에 내려앉고 새빨간 동백은 찻잔을 물들인다. 찻잎이 우러난 엷은 갈색 차를 마시는 내내 해운대 밤하늘에 떠있던 샛노란 달을 떠올린다. 달빛이 들어앉은 차를 마시며 달의 마음이 되어보고 달 사람이 되어 달빛 걸음을 걸어본다. 선운사 한적한 뜨락에서 들리던 새소리와 바람 우는 소리를 마신다. 동백꽃을 피워낸 흙의 이야기와 햇살의 노래를 마신다. 동백꽃에 앉아 붕붕거리던 벌의 날갯짓과 나비들의 춤을 마신다. 씨즐이 주는 축복이다.


볼펜 굵기 정도의 가느다란 크레욜라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색깔들의 이름 때문이었다. 햇빛 오렌지, 심장의 열정, 노을빛 노랑, 한밤중 파랑, 정글 초록, 열대우림 초록, 뜨거운 핑크. 이렇게 시적인 이름을 짓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크레욜라 상자에서 파랑 계열의 색들만을 골라 죽 늘어놓는다. 파랑 초록, 한밤중 파랑, 해군 빛 파랑, 그냥 파랑, 데님 파랑, 태평양 파랑, 로빈새의 알 파랑, 인디고, 하늘 파랑, 터키 파랑. 감각적인 색의 스펙트럼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미지가 먼저 자리 잡는다. 태평양 파랑(pacific blue)과 한밤중 파랑(midnight blue)을 보면서 태평양의 심연과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의 검푸른 밤을 떠올린다. 로빈새는 하늘빛을 닮은 알을 낳기 위해 얼마나 더 자주 파란 허공을 날아야 했을지를 생각한다.


심장의 열정이라 이름 붙은 크레욜라로 심장의 언어를 받아 적는다. 뜨거운 핑크처럼 살아본 적이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본다. 욕망하는 모든 것들을 현재 진행 시제 속에 불러 세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욕망은 유예된 꿈이거나 은폐된 꿈의 형태로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나는 적당히 균형 잡힌 틀. 튀지도 않고 처지지도 않는 삶 속에서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은 내 안의 사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었다.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기 위해 늘 내 안의 사슴에게 먹이를 주었다. 가끔 내 안의 굶주린 이리가 울부짖었다. 이성과 논리로 눌러둔 이리는 그렇게 으르렁거렸다. 내 안의 이리에게 먹이를 주는 일은 어쩌면 나를 전복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낮게 울부짖는 이리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버찌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토가 나올 정도로 버찌를 입에 쑤셔 넣지도 못하였다. 적당히 길들이고 적당히 길들여지는 것을 뜨거운 핑크라 부를 수는 없었다. 결국 뜨거운 핑크로 살지 못하였다. 내 삶은 색깔들의 언어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일까?


광고업계에서는 소비자의 관심을 끌 것 같은 광고를 ‘씨즐감’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 생각하면 씨즐은 다가가는 방법이 아닐까? 씨즐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하기 전 우리를 먼저 끌어당기는 모든 것들이다. 향, 색깔, 소리, 질감, 그 외 다른 감각적인 것들. 우리의 뇌를 흥분시키는 자극적인 언어다. 무언가에 다가가고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언어들이다. 때로 우리는 씨즐에 중독된다. 동백 향이 나는 차를 팔기 위해 우리에게 선운사 동백꽃 이미지를 먼저 파는 것, 스테이크를 팔기 전에 스테이크 소리와 냄새를 먼저 파는 것, 빵을 팔기 전 빵 냄새를 먼저 파는 것. 커피를 팔기 전 향기를 먼저 파는 것. 하지만 때로는 보고 듣고 느껴지는 감각적인 것이 본질을 오독하는 경우도 있다.


씨즐은 비단 사물과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를 선택할 때도 씨즐이 작용한다. 어떤 사람은 내게 씨즐감 있게 다가온다. 어떤 사람의 본질을 읽어내기 전 우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선택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소비될 것인지를 씨즐스럽게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품이 되기도 하고 배경이 되기도 하고 전부가 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당신에게 나의 씨즐은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여질까? 어떤 빛깔과 향기와 촉감의 언어로 해석될까? 또한 나는 당신의 씨즐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보고 듣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씨즐스러운 것들이 도리어 본질을 가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당신을 오독하지 않기 위해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씨즐스러운 것들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아야 한다. 당신에게 해석되는 나의 씨즐이 곧 나의 본질이기를, 그리하여 스며들 듯 번져가는 색의 스펙트럼처럼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나의 씨즐을 당신 마음의 언어로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 하루, 나를 사로잡은 씨즐에 대해서 생각한다. 새소리와 커피 향기와 누군가의 체온, 바흐 음악, 책꽂이에서 풍기는 책 내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 다가오는 발소리들과 멀어지는 발소리들. 안부를 묻는 카톡 소리, 소리와 냄새와 색채와 질감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과 드러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천천히 연관 지어 본다. 오늘의 본질은 오늘의 씨즐에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오늘의 표정에 뜨거운 핑크를 칠해본다. 내 안의 이리가 서서히 깨어난다.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봄의 색채와 향기와 소리들이 일시에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씨즐스러운 봄날 정오, 뜨거운 핑크빛 심장이 씨즐스럽게 펄떡인다. 이리의 울부짖음을 받아 적는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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