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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씨즐 SIZZLE 02화

헤테로토피아로 가는 입구에서 봄 열차를 기다리다

헤테로토피아로 가는 입구에서 봄 열차를 기다리다

우리에게 기억이란 소리와 냄새와 질감의 언어다. 3월은 샛노란 프리지어 향기로 온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처음 입은 교복 냄새, 새 책상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결, 아침을 깨우는 엄마 목소리, 새 교과서의 첫 장을 넘기는 설렘처럼 사소한 것들이 기억의 서랍장 속에 머물다가 어느 순간 특별한 의미로 튀어나온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목요일 오후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뛰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셀 푸코 『헤테로토피아』 (문학과 지성사, 2014)

미셀 푸코는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하는,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적인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 정의했다. 헤테로토피아는 다른 온갖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전도시키며 실제적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라 할 수 있다.

계절과 계절의 점이지대에서 나는 지나간 것들을 소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시작과 끝, 만남과 헤어짐, 익숙함과 낯섦. 설렘과 두려움, 머무름과 나아감, 절망과 희망, 비움과 채움, 가능과 불가능, 사라지는 것들과 사라지지 않는 것들, 결핍된 것들과 충족된 것들을 수많은 열차들이 오가는 플랫폼에서 하나하나씩 끌어내고 있다.

문득 유년의 새하얀 종이배들이 망막에 스쳐 간다. 아직은 시린 3월의 바람에 볼 붉어진 소녀가 되어 종이배를 쫓아 달리고 있다. 하굣길 ‘뽕뽕 다리’라 불리던 커다란 철제 다리 아래로 봄이 재잘대며 흐르고 있었다. 공책 한 장을 쭉 찢어 대충 접은 종이배 하나. 그 종이배는 물살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종이배를 쫓아 달렸다. 종이배가 나를 앞질러서, 때론 내가 종이배를 앞질러서.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좌초된 종이배. 같은 자리에서 좌우로 흔들리기만 하던 종이배를 다시 아래로 흘러가게 하려고 커다란 돌멩이를 ‘풍덩’ 던졌다. 종이배는 잠시 허둥대다가 다시 흘러갔다. 가끔은 종이배가 다시 흐를 수 있도록 돌멩이를 던져 아무리 물살을 바꿔주어도 그 자리에 꼼짝없이 멈춰서 더 이상의 흐름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치 그곳이 자신이 원하던 목적지라도 되는 것처럼.

실망감이 밀려왔다. 아마도 그것은 종이배가 물살을 따라 흘러가지 못함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는 종이배를 쫓아 아래로 달리지 못함에 대한 실망이었을 것이다. 좌초된 종이배를 뒤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 아쉬움이 남았지만 졸졸 흐르는 물 위로 쏟아지던 그 봄의 햇살은 눈부셨다. 3월의 바람에는 겨울을 이긴 봄이 묻어 있었다.

하천 끝까지 줄기차게 흔들리며 내려가던 종이배들도 어딘 가에선 분명 멈추었으리라. 다만 내가 그 멈춤을 확인하지 못하였을 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접었던 그 유년의 종이배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표류하거나 좌초되었거나, 물살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 종이배들. 내 유년을 실었던 종이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쉼 없이 종이배들을 접고 또 접어 하천에 띄우고 알 수 없는 흐름을 쫓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기억의 서랍에는 내 유년의 꿈 한 조각이 종이배로 곱게 접혀있다. 그 시절의 종이배들은 내 안의 헤테로토피아였다.

결 고운 햇살과 찬 바람의 공존, 머무르려는 계절과 나아가려는 계절의 틈새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열차를 기다리며 서 있다. 서로 다른 냄새가 묻어오는 플랫폼에서 새 출발의 내음을 맡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열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어디론가 떠난다. 누군가는 내가 서 있는 역에 내릴 것이고 나는 그 열차에 오를 것이다. 유년의 종이배처럼 또다시 어떤 흐름을 타게 될 것이다.

지난해 타고 왔던 열차에서 묻어온 삶의 흔적들은 아직 내 옷자락에 남아있다. 헤테로토피아들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진다. 시간의 기억들을 더듬는다. 일 년 전 이맘때 어느 역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역에서 지금처럼 열차를 기다렸다.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목적지를 변경할 수도 없는 그 열차는 멀어지는 풍경과 다가오는 풍경들을 모두 가슴에 품고 수많은 날을 달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새 봄이 올 때까지 계절의 언어들을 받아 적었다. 봄은 새소리로, 벚꽃의 흩날림으로 연초록 두근거림으로 거친 땅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강인함으로 제비들의 춤으로 왔다. 여름은 정오의 강렬한 태양과 장맛비, 목덜미로 흐르는 땀, 매미들의 절규로, 민소매 원피스로, 진초록의 녹음으로 왔다. 가을은 단풍과 낙엽으로, 서리 내린 들녘으로, 가느다란 코스모스의 군무로, 불타는 석양과 허수아비의 낡음으로 왔다. 겨울은 나목의 눈부심과 차가운 바람, 메마른 기침 소리로, 안경에 뿌옇게 서리는 김으로, 갓 구운 고구마 냄새로, 새빨간 구세군 냄비로 왔다.

열차 안에서 풍경을 해석하는 일을 제각각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고 해도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삶의 맥락을 찾아내는 일은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 한 줄의 무미한 글이 되기도 하고 의미를 담은 장문의 편지가 되기도 한다. 무지개를 쫓아가는 소년의 마음이 되어보면 열차는 마음이 정하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것이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기를 바라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품고 현재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다가오고 있을 미래를 떠올리는 일은 특별하다. 어쩌면 달리는 열차 안이 바로 나의 헤테로토피아일 것이다.

어디선가 자신만이 느끼고 알아챌 수 있는 속도로 열차는 오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익명이지만 머지않아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 누군가들이 플랫폼에 서성이고 있다. 해마다 3월이면 나만의 느낌으로 열차를 선택하고 낯선 플랫폼에 도착할 때까지 삶을 배우는 일을 반복한다. 때론 잊어버리고 싶은 상처,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고통, 오배송된 택배처럼 불편한 것들의 리스트들이 자꾸만 나를 방황하게 만들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봄에 출발하는 열차는 본질적으로 설렘과 기대감을 품고 온다. 봄 열차가 주는 쾌감이 온몸으로 느껴지면 다가올 모든 것들에 대한 불안은 저만치 뒤로 밀려날 것이다. 자리를 잡고 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가슴에 품는 것만으로도 낯선 것들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질 것이다.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언제나 헤테로토피아가 될 테니까.

열차가 오고 있다. 무엇을 보게 될지, 누구와 동행이 될지, 어떤 인연들이 시작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열차 밖의 풍경도 열차 안의 풍경도 어쩌면 나의 시각이 선택한 것들에 국한될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습성 때문에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도 할 것이다. 때론 보고 싶지 않은 것들과 대면해야만 할 것이다. 낯모르는 이가 동행이 되어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서로에게서 묻어나는 낯선 삶의 냄새를 맡으며 ‘서로’를 학습할 것이다. 열차는 그 모든 ‘서로’를 같은 시간 안에 품고 달릴 것이다. 기억의 서랍에 기억들이 빼곡히 쌓여갈 것이다.

수많은 열차 중 어떤 특별한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면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반응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열차를 향해 다가가 마음이 선택한 열차에 기꺼이 오를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봄의 플랫폼에 공존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봄의 입구,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설렘과 기대를 품고 미래를 향해 달려가면서 수없이 낯선 것들을 만나고 낯선 것들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나는 또다시 봄의 플랫폼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릴 것이다. 해마다 새 열차로 갈아타는 일은 작아진 옷을 버리고 더 큰 옷으로 갈아입는 것처럼 성장으로 가는 길이다.

3월의 바람이 부는 역에서,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 플랫폼에서 온통 연둣빛으로 물든, 어린 새싹 향기를 품은 봄 열차를 기다린다. 화관을 쓰고 가슴속 작은 새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차보다 먼저와 전하는 바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희망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유년의 강물을 떠올릴 것이다. 어디론가 떠나보냈던 수많은 종이배를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내 꿈의 일부 어쩌면 또 다른 ‘나’이기도 한 종이배들을 띄우고 또 띄울 것이다. 새봄의 열차는 나를 싣고 경적을 울리며 ‘가능’에게로 달려갈 것이다. 그 열차 안에서 나는 수많은 ‘불가능’을 잊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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