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기억 속 풍경이 떠올랐다. 문득. 그것은 무의식에 잠복해있다가 아주 오랜만에 의식의 세계로 불려 나왔다. ‘모든 집에는 영혼이 깃들여있다.’는 단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부안에 아름다운 민박집이 있다. 부안 여행길에 함께한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방문하게 된 집이다. 호텔 로비로 노부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남편.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남편 옆에 있는 그녀였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녀는 간간이 눈이 내리기 시작한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았고 짜임이 독특한 니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공주풍 레이어드 스커트, 가느다란 발목 아래 빨간 꽃이 그려진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헌 집을 사서 개조한 민박집은 조용한 길가에 있었다. 흔히 보기 어려운 독특한 소품들이 많았다. 연분홍 마른 꽃들이 거꾸로 매달린 창, 벽난로 앞의 작은 목재 의자, 이야기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부엌, 터키 블루 빛 무늬가 인상적인 그릇장. 금세 장작을 넣기만 하면 뜨거운 불길이 솟아올를 것 같은 벽난로. 창가 쪽 장미화 병, 일부러 짜 넣은 앙증맞은 책꽂이. 민박지기의 눈썰미와 미적 감각이 만들어낸 조화였다,
갤러리 회랑 같았다. 몇 년 전 모 잡지사 카탈로그에 아름다운 집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 말이 빈 말은 아니었다. 아담하고 예쁜 뜰엔 샛노란 들꽃과 연보랏빛 들꽃, 새빨간 양귀비가 뒤섞여 피어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타샤 튜더의 정원이 통째로 옮겨온 것 같았다. 자연스러움과 조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녀의 안목이 느껴졌다.
토방에는 그녀의 꽃무늬 검정고무신 여러 켤레가 햇볕을 쬐고 있었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으면 걷기가 불편해 몇 해 전부터 고무신을 즐겨 신는다고 했다. 고무신만큼 매력적인 신이 없어서 어떤 사람을 알게 되면 습관적으로 고무신을 선물한다고 했다.
한옥 서까래가 그대로 남아있는 부엌에서 찻물이 끓고 있었다. 연신 여기저기 셔터를 눌러대지만 사진에 찍히는 풍경보다 눈의 망막에 찍히는 풍경이 훨씬 아름다웠다. 이 곳에 민박하러 오는 이가 드물다는 것이 축복일까, 축복이 아닐까? 민박지기 입장에선 찾아오는 이가 드물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그곳을 찾은 방문객인 나는 사람들에게 덜 알려져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사람의 발길이 잦아질수록 공간은 그 자체의 존재감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방문객들의 편의를 고려해 자꾸 변형하다 보면 어느 순간 공간 그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과 존재 의미가 퇴색되어버릴 것이다.
뜰과 헛간, 잘 다듬어진 잔디를 보며 문득 이곳이 나의 작업실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꿈이다. 그녀가 그토록 애정을 쏟은 집을 팔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설령 판다고 해도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 또한 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 다시 올 수 있을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에 야생화 가득 핀 뜰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검색창에 그녀가 직접 지었다는 당호 같은 것을 치니 바로 뜬다. 그 아름다운 집을 다녀간 여행객이 올린 사진들이 화면 가득하다. 소유할 수 없는 것들을 눈으로만 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소유 불가능 한 곳.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그 집의 주인이 되어있다. 해가 잘 드는 창가. 결이 드러난 나무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벽난로에 군불을 지피고 낮고 아담한 책장엔 책들을 꽂아두고.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바로 그것이 현실로 가 닿을 수없는 그 어떤 '것' 일지라도 그것을 품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고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