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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씨즐 SIZZLE 09화

걷고 있다

당신과 나 우리 그렇게 계속 걸어가야만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을 가장 치열하게 파고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의 작품 ‘걷는 사람’은 최고 경매가를 기록했고 피카소마저 그의 재능을 질투했다고 전해진다. 자코메티 작품의 대부분은 바스러질 것 같은 가느다란 형체, 비정상적으로 긴 팔과 다리. 군더더기 없이 거칠고 앙상한 뼈대로 구성되어 있다. ‘걷는 것이 바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 그는 무게감 없이 걷는 존재의 가벼움에 집중하였다. 정지되어 있으나 여전히 걷는 것처럼 보이는 조각상은 직립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걸음을 멈출 수조차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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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는 10cm 이하의 아주 작고 빈약한 조각상 하나를 만드는데도 온 열정을 쏟아부었다. 자코메티 작품의 특징은 바라보는 거리와 각도, 조명에 따라 조각상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엄청난 부와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몽파르나스에 있는 7평 남짓 작은 작업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고민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은과 동, 물질에 불과하던 것들이 자코메티의 손을 거쳐 형형한 ‘눈빛’을 지닌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자코메티가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40년 연하의 매춘부 출신 케롤린은 자코메티의 명성에 누가 될 만큼 곤혹스러운 사건들을 수시로 일으켰음에도 자코메티는 그녀를 영감의 원천이라 칭하였다. 세인들의 비난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케롤린에 대한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자코메티의 걸작들 대부분은 케롤린과 함께일 때 완성되었다. 세인들의 평가와 시선에 갇혀 살기보다는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선택한 결과 그런 대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처음 보던 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뼈만 남은 청동 인간의 거침없는 걸음걸이는 ‘결코 걷고 있지 않아도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르트르의 찬사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정지된 그러나 정지되지 않은, 움직이는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그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고독한 인간 군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삶’이라는 짐을 지고 있었기에 ‘걷는 사람’은 늘 고독해 보였다, 앞으로 기울어진 그의 상체, 그의 메마른 얼굴,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은 삶에 대한 고뇌의 상징처럼 보였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나 직립한다. 두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두 팔을 흔들며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저마다의 생으로 전진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월의 무게와 삶의 무게는 우리의 상체를 기울어지게 만들고 고개를 수그리게 하고 어깨를 왜소하게 만든다. 우리의 눈빛을 수시로 흔들리게 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 생각은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한다. 대지와 우리 몸이 수평이 되는 날, 우리의 눈이 더 이상 무언가를 응시할 수 없게 되는 날, 더 이상 두 발로 걸을 수 없게 되는 날, 갈등과 번민마저도 먼지처럼 소멸해 버린 날, 그 날은 우리가 영원히 직립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날이 될 것이다.


다시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을 응시한다. 간결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그의 군상들은 모든 것이 과잉인 이 시대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정보와 물질, 노동과 지식, 자본의 과잉 시대에 과잉은 또 다른 과잉을 불러내고 있다.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은 과잉의 시대에 도리어 결핍을 이야기하고 있다. 넘치는 것들 사이에서는 결핍이 때로 우리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채움보다 비움의 미학을 압도적으로 드러낸 작품이 바로 자코메티의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조각가로서 자신이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듯 자신의 조각들도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걸을 수 있는 한 우리도 날마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걷는 사람’은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단지 걷고 있을 뿐이다. 비, 바람, 눈, 구름을 탓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팔과 다리, 의지를 믿으며 전진한다. ‘걷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시작의 순간이며 태어남의 순간’인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하며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직립하는 한 걸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과정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면 우리의 존재 의미는 대지와 수평이 되는 그 날까지 지치지 않고 끝없이 걷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걸어가는 사람, 우리는 실패하였는가? 그렇다면 더욱 성공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포기하는 대신에 계속 걸어 나아가야 한다.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순간을 경험할 때 비로소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될 것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 걸어야만 한다.”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끝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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