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켜진 창문은 소금별처럼 반짝이고
장마전선이 북상 중이라 했다. 굵은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자신들의 본향을 찾아가는 긴 성지순례 행렬처럼 늘어선 차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에 젖어있다. 마디 굵은 비에 나무는 검은 몸을 뒤흔든다. 천둥 번개가 쳤다. 섬광이 번뜩이고 하늘이 갈라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일시에 암흑에 휩싸인 아파트는 거대한 상자처럼 보였다. 네모 속에 가득 찬 어둠, 점멸 신호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낙뢰로 인한 일시 정전으로 복구 작업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멈춰버린 승강기 때문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웅웅’ 거리던 냉장고의 심장 뛰는 소리도 멈추었다. 깜박이는 커서가 사라진 컴퓨터의 민 낯. 모든 것이 정지된 순간 침묵이 언어가 되었다. 그 어떤 문명의 이기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서랍 어딘가에 있을 초를 찾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초를 사용한 지 꽤 오래라는 생각을 한다. 쓰다 남은 성냥을 찾아 어렵사리 촛불을 켜자 일시에 어둠이 사라진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처음 불을 가져다주었던 때, 불을 처음 본 사람처럼 경외감 가득한 눈빛으로 촛불을 바라본다. 어둠 속 촛불을 켠 집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사람들이 움직이면 그림자도 따라 움직인다. 촛불은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심하게 흔들린다. 예민한 불이다.
전등불 아래에선 전혀 느끼지 못했던 원시적인 감각들이 깨어난다. 문명의 이기가 정지된 순간. 나는 빛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던 구석기인이 되어본다. 그 긴 밤을 무엇을 하며 보냈을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굶주린 늑대의 울음소리를 떠올려보고, 배회하는 이리떼의 샛노란 눈을 떠올린다. 동굴 안에 웅크리고 잠든 수많은 어린것들의 색색 거리는 숨소리, 내일 사냥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남자의 고민, 떠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기도를 떠올린다. 밤하늘에 빛나는 것은 오직 별뿐이었으니 말 그대로 별을 바라보며 별을 헤이며 그 긴 밤을 보냈을 것이다. 밤은 노동에 대한 휴식의 시간이면서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둠의 휘장을 뚫고 반짝이는 불빛들은 점멸 신호처럼 아름답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빅뱅 이후 수소 헬륨 핵융합 반응의 결과로 별이 탄생한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접한 뒤에는 별이 된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둠은 검은 도화지처럼 보인다. 도시의 밤, 모든 것이 숨죽인 시간 나는 문득 소금별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검은 도화지 위에 물감을 번지듯 흘리고 그 위에 굵은소금을 뿌렸던 기억. 굵은소금은 별무리처럼 검은 도화지 위에 색색으로 박혔다. 검은 도화지 위에 피어난 소금별들이 물기를 머금고 꽃처럼 피어있듯 촛불 켜진 아파트도 소금별처럼 빛난다.
오래전 등화관제 훈련이 있었던 때가 생각난다. 철없는 아이들에겐 즐거운 축제의 시간이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빛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거듭 당부하는 통장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돈다. 등화관제 사이렌이 울리는 날은 유리창에 검은 종이를 덕지덕지 붙이고 촛불을 켰다. 촛불 앞에서 손으로 하는 그림자놀이, 독수리, 여우, 사슴, 나비 수많은 동물들이 뛰놀았다. 촛불놀이가 질리면 소리조차 잠든 어둠 속에 누워 소곤거리다 그대로 잠이 들곤 했다. 어른들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료한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에게 어둠은 놀이의 일부였다.
어둠을 몰아내고 오래도록 불을 밝힐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인간들, 전구의 발명은 축복이었다. 화재에 대한 두려움도 불씨를 꺼트리지 말아야 한다는 걱정도 사라졌다. 전등불 아래서 인간은 오랜 시간 행복했을까? 어둠을 정복하는 전사의 얼굴을 한 조명들. 반짝이는 수많은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잃고 배회한다. 밤을 밝히는 조명은 어느 순간 축복의 단계를 넘어 재앙의 단계로 가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든 과하면 추해진다. 빛이 시간을 삼켜버린 뒤로 아침이 어둠의 커튼을 열 때까지라는 말은 더 이상 쓸모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이 불빛을 쫓는 나방처럼 불 밝힌 도시로 몰려든다. 수많은 빌딩 속 전등불 아래 밤을 낮 삼아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불을 끌 사이도 없이 아침이 오고 또 불면의 하루를 살아간다.
늦은 밤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바라보면 환하게 불 밝힌 유리창들이 보인다. 누군가도 나처럼 쉬이 잠들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는 것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 직장에서 다하지 못한 일들을 하거나 밀린 숙제를 하는 사람들. 졸음을 쫓아가며 시험공부를 하거나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들. 잠들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걱정거리들이 불면의 언어가 되어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밤 풍경이다.
하나하나 불 켜진 창들이 모여 만든 도시의 벌집. 내일 아침 일찍 어딘가로 꽃 꿀을 따러, 꽃가루를 채집하러 가야 하지만 오늘 밤은 달콤한 휴식을 누려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사회, 잠들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온통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도시의 벌집은 모처럼 평온하다. 붕붕거리던 벌들도 때 아닌 밤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거센 비 내리고 벼락 치던 오늘 밤, 사람들은 어쩌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예된 어둠의 시간이 좀 더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일까지 처리해야 할 일거리, 밀린 숙제들로부터 잠시 해방된 시간이다.
일체의 문명이 중단된 어둠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불빛을 응시하는 것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밤하늘을 바라보는 일, 모처럼 어둠 속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 그리고 오롯이 기다리는 일뿐이다. 정전 복구 완료 안내 방송을 기다리고 일체의 가전제품들이 다시 숨쉬기를, 수돗물이 나오기를, 승강기가 다시 작동하기를 기다리는 일 온통 기다리는 일뿐이다.
요란스럽게 내리던 비는 이미 그쳐있다. 베란다 창문으로 고개 내민 사람들이 모처럼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에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문명이 주는 혜택을 누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멈춰버릴 때에야 비로소 별빛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와버렸을까를 깨닫는다. 도시의 현란한 불빛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던 별빛이 오늘은 유난히 밝다.
정전 복구 완료 안내 방송이 나온다. 순식간에 아파트는 빛을 되찾았고 별빛은 저만치 물러나버렸다. 하나씩 깜박이던 불빛들은 꺼져가고 현란하고 거대한 조명들이 다시 넘실거린다. 아파트는 벌써 도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일시에 켜진 전등 불빛이 만들어낸 밝음 속 촛불은 초라하게 일렁거리고 있다. 촛불을 꺼야 할 시간이다. 단숨에 훅 불어 촛불의 춤을 중단시킨다. 촛불의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전화기의 요란한 신호음이 울리고 냉장고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승강기는 다시 위아래로 쉼 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밀린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컴퓨터의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고, 수험생들은 다시 책을 펼 것이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 저 멀리 어등대교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긴긴 행렬이 보인다. 불 밝힌 도시 어디로든 불나방처럼 질주하고 있다. 찬란한 슬픔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