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씨즐 SIZZLE 14화

검정 A라인 원피스가 바람에 휘날리고


계절의 점이지대다. 한 계절의 끝과 다른 한 계절의 시작. 끝과 시작은 중첩되어있어서 분리가 불가능하지만 햇살의 질감과 빛깔에는 이미 새로운 계절의 언어가 스미어있다. 벌써 옷장을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여름옷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상자에 담고 옷장 안에는 가을 옷을 넣는다. 지난가을 입었던 옷들을 꺼내어 옷걸이에 걸어 본다, 겹쳐진 부근에 주름이 생긴 것들은 다리미질을 다시 해야 한다. 지난가을의 냄새가 여전히 묻어있는 옷들도 있다. 옷장은 이제 새 계절을 입는다.


옷장 한 구석에 늘 걸려있는 옷이 있다. 1년 12달 계절과 상관없이. 바로 검은색 A라인 원피스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입한 옷이니 무려 20년 넘은 세월을 옷장 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곰팡이가 슬진 않았는지 확인하며 통풍을 시킨다. 햇살 아래 걸어둔 검정 원피스가 바람에 날린다.


“얘, 너희 시 어르신, 시할머니도 계신데 그래도 검정 원피스 한 벌은 있어야 하지 않겠니?” 퇴근 후 엄마와 들른 백화점. 정장을 고르려다 검정 A라인 원피스 앞에서 멈춰 섰다. 스퀘어 넥. 단아하게 A라인으로 퍼지는 드레스, 끝단에는 검은색 레이스가 고급스럽게 달려있었다. 아름다운 옷이었다. 아마도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시외숙모님 장례식에서 제일 먼저 입을 확률이 컸다.


“세상에 종이 한 장에도 운명이 있나 보다.”, “뭐가?” “저 종이 좀 봐라. 다른 곳으로 날아가면 될 걸, 뭐 하러 자꾸 도로 한 복판으로 들어간다니.”

어디선가 날아온 전단지 한 장이 바람에 날리며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백미러로 뒷 자석에 앉은 엄마 얼굴을 바라본다. 엄마는 도로 한 복판을 위태롭게 질주하는 전단지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종이 한 장의 운명이란 것, 사실 이제 갓 30대인 나에게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거나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내게는 의미 없는 것 혹은 극복 가능한 것들일 뿐이었다. 그건 종이의 운명이었을까? 종이의 자유의지였을까? 알 수는 없지만 바람은 분명 종이를 위태로운 곳으로 인도했다. 그것이 운명인지, 종이의 의지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종이의 움직임을 한참 동안 넋 나간 듯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대병원 심장센터, 급히 연락 요망.” 책상에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서랍 속 삐삐에는 같은 번호가 30번이나 찍혀있었다. 삐삐는 사무실 서랍 안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울었으리라. 하필이면 삐삐도 가져가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직원들과 점심을 멀리도 먹으러 갔다. 허둥지둥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깊숙이 주차된 차를 뺄 겨를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으로 달렸다.


“점심 같이 먹을까? 마침 시내 나갈 일 있는데”, “오늘은 안 되는데, 행사가 있어서 직원들과 점심 함께 먹어야 해. 담에 보지 뭐. 바쁘기도 하고.” 바로 몇 시간 전 통화했던 엄마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필경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가족, 혈연. 그게 무슨 대수라고 직계 가족의 서명이 들어가야만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명과 동시에 엄마의 심장 수술이 시작되었다. 급성 심근 경색. 촌각을 다투는 수술이건만 너무 늦었다. 성당에서 자매님들과 미사를 마치고 나오던 엄마가 갑자기 길에서 쓰러졌고 자매님들이 서둘러 119로 호송했지만 지척에 있던 딸은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도로 위를 질주하던 그 날의 종이, 그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을까? 자동차 백미러로 보이던 어딘지 모르게 넋 나간 사람 같았던 엄마 얼굴 생각이 났다.


딸들이 엄마를 기억하는 일은 때론 고통스럽다. 엄마 가슴에 적어도 한 번은 대못을 박았던 기억이 있을 테니까. 엄마는 비수처럼 박힌 대못을 스스로 빼서 감추었다. 흐르던 피도 마르고 상처도 아물었다. 그 상처를 모르는 이는 오직 딸뿐이다. 아니 어쩌면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 심지어 딸은 비수를 던졌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테야. 절대로.” 엄마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처럼’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달고 살았다.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가격을 흥정하려 했고 남의 시선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살기 위해 억척스러운 모습이 내 눈에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절약이 습관처럼 몸에 베인 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 날, 누구보다 앞서고 싶었으나 정작 앞서지 못했던 나는 늘 엄마 탓을 하며 살았다. ‘엄마처럼 살아가지 않을 거야’라는 말 한마디로 엄마의 삶을 규정지었다.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엄마에게 투사하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이었다. ‘엄마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정작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엄마의 새벽은 늘 불미나리 즙과 케일 가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때론 붕어를 고는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이른 새벽 녹즙을 들고 아빠가 입원해있던 전대병원으로 향했다. 수척하고 마른 얼굴의 아빠가 야윈 손으로 녹즙을 받아마셨다. 케일과 불미나리 즙을 배달하던 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화단의 새빨간 동백이 피고 질 무렵 아빠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다. 예견된 죽음이었지만 아직 젊은 엄마의 오열은 슬펐다. 이른 봄 햇살은 따사로웠고 새파란 하늘 위로 만장이 휘날렸다. 삼베옷을 입은 엄마가 울면서 뒤따랐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동명동 집을 떠났다.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신축 성당이 훤히 보였다. 엄마는 언덕을 오르내리며 새벽 미사에 다니셨다. 아무도 없는 휑한 집으로 혼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싫다던 엄마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중환자실. 오르락내리락 포물선을 그리던 선이 갑자기 쭉 일자로 그어졌다. 하얀 시트로 덮인 엄마의 몸. 투입된 약물 때문에 퉁퉁 부은 손이 시트 사이로 보였다. 다급했던 순간을 상징이라도 하듯 쭈욱 일자로 잘린 엄마 옷, 주인 잃은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꿈틀거리던 곡선이 직선으로 바뀌는 것이 죽음이란 것을 처음 알았다. 늘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엄마를 부르며 통곡했다. 수많은 대못들이 죽은 엄마 몸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의 어리석음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신축 성당 최초로 열린 장례식이었다. 시외숙모님 장례식 때 입으려던 검정 A라인 원피스를 그날 처음 꺼내 입었다. 천천히 관을 밀고 들어갔다. 레지오 깃발들이 늘어서 있었다. 성수를 뿌리고 하얀 국화를 봉헌했다. “야훼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저 푸른 풀밭에 나를 뉘어주시고 주님 영광 안에서....”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엄마는 도로 한 복판을 질주하던 그 날의 종이와도 같았던 운명이었을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엄마의 운명이 되어버린 것일까. 저 푸른 풀밭에 주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랐다. 장미가 피기 시작하던 5월이었다. 엄마와 내가 함께 골랐던 옷, 설마 엄마의 장례식에 맨 처음 입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 해 계절이 바뀔 때까지 내내 검정 A라인 원피스로 살았다. 검정 A라인 원피스는 출근복이면서 상복이었다. 엄마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이면서 엄마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유물이었다.


연례행사처럼 거울 앞에 서서 그 원피스를 입어본다. 세월의 무게. 나잇살 때문인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허리라인 이상으로는 지퍼가 올라가지 않는다. 원피스로서의 용도를 상실한 지 오래지만 나는 그 옷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다. 한 순간에 꺼져버릴 불꽃처럼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인간의 삶, 이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검정 원피스 어딘가에는 아직 남아있다. 지난날의 아쉬움들이, 어리석음들이, 간절함들이, 아직 다하지 못한 마음들이 옷장 안에 박제처럼 자리 잡은 원피스에 켜켜이 쌓여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던 어리석음이 검정 A라인 원피스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엄마만큼 강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며, 세상에 맞설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결국 엄마처럼 산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이를 먹어갈수록 깨닫는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하루하루 햇살과 바람의 밀도가 달라지고 있다. 내 인생도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 아니면 가을의 초입이다. 이번 추석엔 엄마 묘소에 가서 진심을 다해 고백하고 싶다.

‘당신처럼 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신처럼 살 수도 없었다고.’

쨍한 햇살 아래 널어둔 검정 A라인 원피스가 여전히 바람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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