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얼빠졌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예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내 얼굴을 별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은 제 멋대로 흘러가면서 20대의 찬란한 틈새에 나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20대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넘치는 건 주체할 수 없는 젊음과 시간과 기회들이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그 현재에 살지 못했다. 20대의 나에게 불만이 많았고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정체된 나의 시간이 두려웠다. 어디선가 멋진 고급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추기를 혹은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호박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으면 싶었다.
20대는 정해지지 않은 반죽과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정해지지 않은 형체가 불만이었다. 20대가 어서 빠르게 지나가 무언가가 되기를, 되어있기를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된 것이기를 바랐다. 아직 날 것의 나는 이미 그때 늙음을 원했다. 병실의 시들어가는 노란 프리지어처럼 가능한 한 빨리 늙고 싶었다. 날 것은 비리다는 것. 젊음은 싱싱하기에 비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비린 맛을 견딜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나의 젊음이, 황금같이 주어진 그 날들이 짐처럼 무거웠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세상은 세상의 방식대로 잘도 굴러갔다. 거리의 사람들은 행복했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쉼 없이 어디론가 떠나는 버스는 왔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에게 용감하지 못했고 막상 어디로든 떠나지도 못했다.
아마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직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3월 햇살은 따사로웠고 새로 조성한 무덤의 잔디는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그토록 갑작스러운 부재를 견딜 수 없었다.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나는 나를 돌보지 못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백마 탄 왕자와 호박마차를 기다렸다. 내 옆의 것들은 시시하다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그냥 그것이면 족하다는 것을 왜 나는 알지 못하였을까? 불안정한 젊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예쁨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모든 것이었음을 왜 깨닫지 못하였을까?
비리고 싱싱하던 것들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나는 가장 예뻤던 날이 지나갔음을 안다. 내가 가장 예뻤던 날은 돌아갈 수 없기에 가장 예뻤다고 기억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