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과 층 사이 우리는 끼워져 살아간다
소음공해.
아래층에서 이사를 갔다. 새로 들어올 이가 리모델링 작업을 의뢰한 모양이다. 아침 일찍 시작된 드릴소리는 안방, 화장실, 거실을 가리지 않는다. 전화 통화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엘리베이터에는 공사 기간 안내가 붙어 있다. 어쩔 수 없으니 양해해달라는 명징한 단어처럼 보인다. 공사 중이라는데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같은 라인에서 공사를 해도 이렇게 심각하게느낀 적은 없었는데 바로 아래층 공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오정희의 단편 소설 ‘소음 공해’는 위층과 아래층 세대의 소통 부재의 현실을 ‘소음’을 매개로 하여 서술한다. 작중화자인 ‘나’는 심신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즐기려 한다. 그때 갑자기 위층에서 들리는 소음. 상당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소리다. 밤낮없이 정체불명의 소음은 이어지고 그녀의 가족들은 괴로워한다. 소음의 정체에 대해 여러 추측을 해보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나’는 인터폰을 통해 경비원에게 위층에 주의를 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소음이 멈출 줄 모르자 계속해서 항의 전화를 하던 ‘나’는 마침내 위층 사람과 인터폰으로 직접 대화를 나눈다.
“ 아래층인데요.나도 참을 만큼 참았다구요. 공동주택에는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잖아요. 난 그 소리 때문에 병일 날 지경에요.”
“여보세요. 난 날아다니는 나비나 파리가 아니에요. 내 집에서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나요? 해도 너무하시네요. 이틀거리로 전화를 해대시니 저도 피가 마르는 것 같아요. 저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언제까지 경비원을 사이에 두고 ‘하랍신다’. ‘하신다더라’ 하며 신경전을 펼 수도 없어 지난 겨울 선물로 받은 실내용 슬리퍼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벨을 누른다. 선물도 때로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대견해하며 벨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십 분 가까이 지나 문이 열린다. 좁은 현관을 꽉 채우며 휠체어에 앉은 젊은 여자가 달갑잖은 표정으로 올려다보며 말한다.
“안 그래도 바퀴를 갈아 볼 작정이었어요, 소리가 좀 덜 나는 것으로요. 어쨌든 죄송해요. 도와주는 아줌마가 안 계셔서 차 대접할 형편도 안 되네요.”
여자의 텅 빈, 허전한 하반신을 덮은 화사한 담요와 휠체어에서 황급히 시선을 떼며 나는 슬리퍼 든 손을 등 뒤로 감추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아파트는 켜켜이 쌓인 퇴적층처럼 보인다. 몇 번의 단층과 부정합과 습곡을 거친 지층. 누군가를 머리에 이고 누군가를 발아래에 두고 산다. 아파트에 사는 우리는 1층에 거주하지 않는 한 공중에 떠서 사는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사람의 삶. 소음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정희작가가 ‘소음’에 ‘공해’라는 단어를 붙인 것만으로도 그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층간 소음으로 이웃 간 분쟁이 발생하고 심지어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래층에서 수시로 올라왔다. 심야 택시 운전을 하니 낮에 잠을 자야한다며 조금만 소리가 나도 올라와 벨을 누르던 사람. 벨 소리가 나면 나도 모르게 범죄자처럼 가슴이 움츠려들었고 아이는 제방으로 숨었다. 아이는 뛰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그 또래 아이들보다는 조용한 편이었음에도 나는 아이가 걸을 때 마다 주의를 주곤 했다. 집에 들어오면 늘 아래층 사람이 의식되어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래층 사람은 수시로 벨을 눌렀다. 이사를 결정하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아래층 때문에 이사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아래층에 백기를 들고 미련 없이 떠났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 나는 소음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고 소음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조심해도 나의 조심 여부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예민하게 느끼면 소음 가해자가 되었다. 소음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최대한 견디는 것으로 대신했다. 누군가의 집 앞에 서서 벨을 누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쉼 없이 찾아와 벨을 누르던 것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쫓아 올라가 밸을 누르느니 차라리 우아하게 견디는 피해자가 되기로 했다
누군가 벨을 누른다. 얼굴을 잘 모르는 이다. “위층이에요. 우리 아이가 마구 뛰어서요. 죄송해서” 그녀가 샤인 머스캣 한 상자를 내민다. 사실 한 달 전부터 밤낮없이 쿵쿵 거리는 소음 때문에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 아이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견디기로 했다. 아이더러 일부러 뛰라는 부모가 있을 리 없다. 아이들은 걸을 때도 뛰는 것처럼 걷는다. 그것이 그 또래의 습성이려니 생각한다. 움직이는 성좌와 같은 아이를 묶어둘 수는 없지 않은가.
미안함의 표현으로 그녀가 전해 준 포도 상자. 얼떨결에 받긴 했지만.... 받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음에 대한 견딤의 댓가인가, 이웃간의 배려인가, 관심인가 예의인가. 그런 것들을 따져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위층 사람을 머리에 이고 산다. 아래층 사람은 나를 머리에 이고 살아간다. 마치 어릴 적 레고처럼 켜켜이 잘 끼워진 사람들이 층을 이룬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끼워진 채로 서로를 이고 살아간다.
이른 아침 시작된 공사. 오늘이 공사 첫날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견뎌야할까?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잘 견디는 연습. 이어지는 소음 앞에 나의 견딤은 자꾸만 무력해지려 하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끼워져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우리는 서로의 한 조각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