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씨즐 SIZZLE 17화

기차를 기다리는 이리들과 꽃다발을 든 여인

기차를 기다리는 이리들과 꽃다발을 든 여인

말(言)들이 철로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으로 달렸다.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ktx 산천 4201호.

늦은 밤, 열차 도착 지연 안내 방송이 이어진다. 가방을 열어 ktx 기차표를 다시 확인한다. ktx산천 547은 전광판에도 뜨지도 않는다. ktx 546은 현재 93분째 지연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전광판을 향한다. 상행선 기차는 속속 들어오고 있으나 하행선은 몇 시간 째 묶여있다. 전광판은 적어도 오늘만큼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다. 묵묵부답인 전광판을 바라보는 것도 지쳐갈 무렵, 날 선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역장 어딨어? 당장 나와!”

무전기를 든 직원에게 몰려가 항의하는 사람들. 환불을 요구하는 긴 줄이 매표소 앞에 생겼다.


역장 없는 역사에서 역장을 찾고 있다. 매표소에 표를 집어지고 말(言)들을 집어던졌다. 정체불명의 말(言)들이 부서져 달렸다. 누군가의 등 위로 누군가의 머리 위로. 부서진 말(言)의 파편들이 달렸다. 기차는 들어오지 않는데 말(言)들이 앞서 달렸다. 개찰구 너머 밤의 능선을 따라서 온기 없는 말(言)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그 말(言)들은 누군가의 배설물들이었다.


말(言)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는 시간이다. ‘선로 복구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복구되는 대로 정상 운행 예정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기다려 달라는 안내 방송과 지연보상 안내 방송이 동시에 나오고 있었다. 기차가 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 거짓 정보들이 오갔다.

여행 가방을 의자 삼아 깔고 앉은 사람들. 텅 빈 역장실로 몰려가는 사람들. 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들, 누군가가 던진 물병이 누군가의 안경에 맞았다. 금 간 안경알이 바닥에 떨어졌다. 날카로운 말(言)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딨나. 30분도 아니고 3시간 30분이 뭐냐고. 힘없는 것들은 그저 무작정 기다리라고. 대책이 있어야지. 대책!”

날 선 목소리들이 징징거리며 울고 있다. 이리처럼 쏘아보는 눈빛들. 누구든 말 한마디 잘못하면 제물 삼아 철로에 집어던질 기세다. 역사 밖으로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레몬 빛 가로등이 켜졌다. 버스마저 끊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공단 드레스 차림으로 장미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나를 이리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서울에서의 행사 참석 뒤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려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기차역으로 바로 온 탓이다. 아수라장이 된 역사, 오늘 밤 안으로 열차가 들어오긴 할까? 대합실에서 밤을 새운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가야 할 곳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방향성 없는 기다림, 방향성을 지닌 분노 사이에서 갈등했다. 소리들이 섞이는 대합실에서 낯모르는 이들이 기묘한 연대를 이루었다.


오십보 백보이긴 하지만 547보다는 그래도 546으로 표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며 매표소를 향한다. “저 547 대신 546으로 교환해주세요.” “교환하시면 지연보상금 못 받으시는 거 아시죠?”, “네, 괜찮아요.” 교환된 티켓을 받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아, 고객님, 잠깐만요 방금 공지가 떴어요. 임시 열차가 투입된다고 해요. 서울에서 목포발 KTX 산천 4201. 10시 40분 출발이에요, 게이트 9번으로 가세요. 지금 가지고 계신 기차표로 아무 자리에나 앉으시면 되어요. 무조건 타셔야 합니다. 하행선 마지막 기차일지도 몰라요.”

두 다발의 꽃과 책을 든 검은 옷의 여인인 나는 전광판 앞으로 걸어갔다. 이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등 뒤로 꽂혔다. “광주, 목포 방향 가실 분들은 9번 게이트로 내려가세요. 임시 열차가 들어온답니다. 서두르세요”


반드시 이 열차를 타야만 했다. 이리들은 전지전능한 전광판을 외면하고,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호명하던 역장을 포기하고, 직원과의 실랑이를 멈추고, 누군가와 무의미한 언쟁을 중단하고 9번 게이트로 달렸다. 희생양을 찾아 철길에 집어던질 기세였던 사람들은 이제는 무조건 타야 한다는 열망에 불이 붙었다. 말(言) 고삐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타야 한다는 욕망들이 달렸다.

에스컬레이터 운행은 이미 끊긴 지 오래다. 어쩌면 막차일지도 모를 목포행 ktx 열차를 놓칠까 봐 계단을 뛰어 달리는 이리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의 눈이 일제히 열차가 들어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ktx 산천 4201이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역내에서는 여전히 열차 지연 안내, 지연보상금 안내 방송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전광판 아래 모인 사람들은 아직도 날 선 말(言)들을 던지며 오지 않는 열차에 대해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편리함과 빨리 빨리에 길들여진 우리들은 문명의 단맛에 젖어 살다가 한 순간의 오작동으로 모든 것이 정지되면 문명의 왜소함에 절망하고 기한 없는 기다림에 분노한다. 무대에 오른 우리는 무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욕망과 이기심과 분노를 끌어내었고 추한 말(言)들을 배설하였다. 온기 없는 것들이 무대 위에 넘쳤다.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뾰족해졌고 이빨은 날카로워졌으며 삼각형 두 귀가 생겼다. 날렵한 몸에 갈색 꼬리가 생겨났다. 옷은 사라지고 모두 벌거숭이가 되었다. 예의도 존중도 배려도 없었다.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고, 무대의 불이 꺼지는 순간까지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말했다. 기차역을 무대로 한 한 편의 즉흥극에서 나는 검은 옷의 여인이 되어 이리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다. 메시아처럼 나타난 여인의 뒤를 따라 평화로 위장된 이리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다. 연극은 다행히 그렇게 끝났다. 만일 임시열차 ktx 산천 4201이 10시 40분 도착 시간을 어겼다면 이리들은 거짓 정보에 대한 응징으로 꽃을 든 검은 옷의 여인을 꽃과 함께 철길 위에 내던졌을지 모른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평범 속에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감추고 있다, 깊숙이 감춰진 것들이 최악의 상황에선 저절로 발아한다. 나의 욕망과 누군가의 욕망이 충돌할 때, 나의 욕구가 어떤 이유로든 충족되지 못할 때 분노한다. 낯선 이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기는 쉽다. 예기치 못한 혼돈의 상황에서는 오직 ‘나’를 위해서 ‘우리’라는 말은 쉽게 버려진다. 불편하고 불행한 것들 사이에서 ‘나’는 ‘우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이기적인 표정을 읽어내는 일은 슬프고 아리다.


서둘러 열차에 오른다. 정해져 있지 않은 좌석은 오직 누군가의 좌석이면서 모두의 좌석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의 좌석이었다. 열차에 탔다는 사실만으로 이리들은 이미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시 ‘우리’가 되어있었다. 표정에 온기가 돌았다. 부릅뜬 눈들이 부드럽게 감겼다, 어둠이 깊게 내린 시간이다. 이제 창 밖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에 사람들의 퀭한 얼굴이 반사된다. 그들의 얼굴 위로 내 얼굴을 겹쳐본다. 소담한 빨간 장미와 노란 장미 다발이 그들의 얼굴에 포개진다.

열차가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로 위에 나뒹구는 말(言)들 위로 ktx 산천 4201이 달렸다. 소리의 뼈들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위로 겨울의 서막을 알리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는 말(言)들이 잠들기 시작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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