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이 날리는 벚꽃은 버려진 봄의 꿈 /수정
스스로 소멸하고 싶은 자와 그 소멸을 멈추게 하고 싶은 자의 힘겨루기. 봄은 그런 계절이다. 초속 5cm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떨어지는 벚꽃 잎을 손으로 잡으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데 굽이 굽이 이어진 벚꽃길, 화순 너릿재 가는 길. 벚꽃 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질 때마다 벚꽃 잎 한 장 한 장 사이의 허공은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벚꽃은 하르르하르르 웃으며 떨어지는데 뒷자리의 시엄마는 마른 입술을 딸싹이며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않는 소리들, 입 모양과 돌아가는 묵주 알로 짐작할 뿐이다
“오늘 날씨 참 좋아요. 어머니.”
일부러 목소리 톤을 높인다.
“그래.... 벚.... 꽃.....”
독백인지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아주 느리게 흘러나온다.
그녀의 망막에는 그 어떤 벚꽃도 맺혀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생의 마지막 길, 눈처럼 내리는 4월 벚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진눈깨비처럼 내린 들, 꽃비처럼 내린 들 그녀 몸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자리 잡은 10cm 암덩어리만이 오직 4월의 봄을 설명할 뿐이다.
"췌장 뒤쪽에 아주 교묘하게 자리 잡았네요. 차라리 눈에 황달기가 나타났더라면 미리 검사하고 제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네요. 이런 경우는 몸에 징후가 빨리 나타나는 편이 치료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그 분야의 권위자 p교수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아직 시엄마는 정확한 병명조차 알지 못한다. 시엄마는 몇 달 전 허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통증의학과와 신경외과를 전전하며 허리 통증, 신경치료에만 매달리느라 금쪽같은 시간을 놓쳐버린 뒤다. 아무리 물리치료를 하고 신경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어 다른 장기의 질환을 의심할 즈음엔 우리를 비웃는 듯 이미 암 덩어리는 더 크게 자리 잡았다.
몇 해전 시 고모 병문안 때 마지막으로 왔던 병원. 병문안을 마치고 내려오던 때, 뒤 뜰에서 마주친 복숭아 뺨을 지닌 젊은 여인, 가슴을 도려내었는지 환자복 아래 절벽 같은 그녀의 가슴. 새하얀 우유 주사가 그녀 몸 안으로 방울방울 들어가고 있었다, 햇살은 유난히도 고왔다. 복숭아빛 뺨 울 지닌 그녀를 보고 시엄마는
“젊은 사람이 어쩌다 저리 험한 병에 걸려 고생일까.”
“어쩌다 저리 험한 병” 그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피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다는 말... 모든 병은 어쩌다 걸리는 병인지도 모른다
어쩌다 걸리는 병. 하필 그 어쩌다가 자신에게 해당될 때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불운한 여주 안공이 되고 만다
어쩌다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모여드는 곳. 어쩌다 병에 걸린 이들, 자기 발로 걸어서 오든 휠체어를 타고 오든 요란한 소릴 내는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실려오든. 어쩌다 병에 걸려 어쩌다 이곳에 최종적으로 모여든 이들에게 희망이란 어쩌다 걸려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귓가에는 불과 몇 년 전 건강하셨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맴돈다.
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시엄마를 흘낏 바라본다. 시엄마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다. 묵주는 마르고 긴 손가락에 걸려 있다. 마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간절한 기도문은 간간이 중단되고 기침 소리만이 차 안을 메운다. 병명은 알지 못한다 해도 c 병원이 ‘암환자 전문 병원’이라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으리라.
가도 가도 끝없는 너릿재길. 온통 도발하는 벚꽃들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 낙하하는 벚꽃들의 난무. 어디로 흩어지는 것일까. 바람이 불 때마다 무리 지어 소담히 쏟아지는 벚꽃들. 쉼 없이 피고 지고 흩날리는 꽃잎들이 봄의 꿈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슨 꿈을 찾아 달리는 것인가?
봄날. 벚꽃비가 내리는 날 그 화려한 봄날. 한 여인이 생과 사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이미 정해진 답을 알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희미한 희망, 이미 정해진 답이 맞는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달려가는 길. 조직 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다.
시엄마에게 뭐라 설명해야 할까? 흔히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 환자가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병으로 둘러대는 것, 아니면 정확하게 알려주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들을 정리하게 해야 할까?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 병명을 알지는 못해도 이미 치료 가능 시기를 지나버렸다는 것 또한.
창구 앞 수많은 사람들이 번호표를 뽑아 들고 대기 중이다. 밖의 화사한 풍경과는 달리 병원 안의 풍경은 스산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표정 탓일 것이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아 있다. 다들 웃음이 없다. 병원 실내에는 계절이 없다. 일 년 열두 달 늘 같은 계절일 것이다. 박제된 계절.
닥터 P가 화면으로 확대해서 보여주는 조직검사 결과. 이변은 없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수치가 높아졌다. 암괴의 크기가 커졌다. 나도 모르게 눈에 이슬이 맺힌다.
지하 회랑에는 종교실들이 있다. 조용하고 긴 복도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뿐이다. 죽음으로 가는 통로가 있다면 바로 이런 긴 회랑을 지나야 하는 건 아닐까? 저 회랑 끝까지 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죽음의 문이 나오는 건 아닐까? 엄숙, 절제된 분위기, 삶의 고해성사 길. 긴 회랑을 눈물 삼키며 걷다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 조직검사 결과 나왔는데 많이 쉬어야 한대. 연세가 있고 통 먹지 못해 몸이 쇠약해서 수술도 어렵다고 해. 아마 치료가 오래 걸릴지도 몰라. 잘 견디면 좋아질 수 있대요. ”
시엄마는 눈시울 붉어진 며느리의 눈을 잠시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린다.
‘네가 말 안 해도 나는 알고 있다. 내게 중요한 건 남은 시간이야. 치료도 완치도 아닌. 70 평생이면 살만큼 살았다....... 차라리 남은 시간을 사실대로 말해주지 그러니’
시엄마의 얼굴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병원 앞뜰에는 벌써 철쭉 꽃봉오리가 맺혀있다. 연초록 입사귀와 단단히 여문 꽃망울들. 파라솔 아래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사람들.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아름답다. 살아있는 자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남은 자들은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다. 4월의 햇살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미 삶의 끝을 감지해버린 자에겐 갓 내린 커피 향도 상큼한 샌드위치도 무의미하다. 벚꽃도 사월도. 이제 봉오리 맺히기 시작한 철 이른 철쭉도.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던 시 엄마의 몸이 눈에 띄게 작아져 보인다. 완치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병원 순례를 해 온 탓인가, 지친 표정의 그녀가 하늘도 꽃도 보지 않고 오직 주차장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연분홍 벚꽃 잎이 유리창 위로 흩날린다.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제 시엄마는 더 이상 묵주기도를 하지 않는다. 결과를 보기로 하고선 며느리 혼자만 담당의를 만나러 가고, 지하 복도를 한참 걸어 눈시울이 젖은 채 나타난 며느리의 얼굴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같은 꽃길을 달리는 수많은 차들. 그 위로 벚꽃 잎들이 공평하게 쏟아지는데 차 안에 앉은 사람들의 사연은 저마다 제 각각이다. 이 곳에 와서 희망을 품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는 차들이 몇 대나 될까? 벚꽃들은 아무 생각 없이 하르르하르르 웃으며 유리창을 두드린다. 손을 내밀어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면 정말 소원이 이루어질까? 초속 5cm.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떨어지는 벚꽃 잎들을 손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받아 안을 것이다.
철없는 벚꽃들이다. 정말 대책 없는 벚꽃들이다. 부질없는 봄의 꿈들이다. 하르르하르르 벚꽃들의 철없는 웃음만이 차 뒤를 따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