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씨즐 SIZZLE 19화

우리들의 찬란한 덧없음의 시대에

봄은 색으로 온다

한 겨울. 눈을 뒤집어쓴 나무들. 어떤 나무인지 알기 어렵다. 메마른 나무들은 저마다의 속에 꿈틀거리는 뜨거운 것들을 감추고 있다가 봄이 오자 일시에 터뜨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매나 꽃을 보고 비로소 그 나무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누구인지 모르는 익명의 '사람'에서 누구인지를 알게 되면 비로소 '000'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듯이.

인간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였다가 봄이 되면 나무의 본질에 걸맞은 '이름'을 회복한다.

이토록 여리고 찬연하고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꽃이 모과꽃임을 알고 새삼 놀랐다.

울퉁불퉁한 모과의 어미가 이처럼 작고 아담한 여린 꽃이었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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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모과나무, 진초록 짙은 잎사귀에 연분홍 꽃. 꽃이 지면 모과 열매가 익어갈 것이다. 초록의 작은 열매가 노랗게 익어가는 동안 초록잎은 시들고 말라간다. 모과 열매는 생김새는 어미를 닮지 않았으나 향기만은 닮았다. 가을이 되면 커다란 나무 끝에 매달린 모과 열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어느 해 가을바람이 몹시 불던날 아파트 모과나무에 덜 익은 모과들이 후두득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먹지 못할 초록 열매들... 아직 아침이 밝아오기 전. 가로등 아래 초록 열매들이 뒹굴던 모습...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몇 개를 주워왔던 기억. 아마도 그것은 익어가지 못한 채 중단되어버린 젊은 모과의 생에 대한 예의 같은 것이었다.

모과 꽃이 피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없음'에서 '있음'을 만들어내는 나무들의 능력 앞에 인간은 초라해진다. 나무 안에 숨어있는 생명 에너지들, 초록이거나 분홍이거나 노랑이거나... 그 수많은 색들을 감추고 있던 나무의 경이로움에 대하여 또다시 감탄하게 된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일시에 터져 나오는 나무들의 꿈들 앞에 쉽게 접어버린 지난날의 꿈들이 떠올라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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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함석 담장 위 , 연분홍 꽃이 피었다. 봄은 색으로 온다.

파란 함석 대문은 인간의 유입을 차단하려는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봄입니다. 봄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봄은 그저 바라만 보십시오."

파란 함석 대문 위로 흐드러진 연분홍.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연분홍 흐드러짐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나 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파란 함석 대문 때문임을...

아무도 보는 이 없던 낡은 함석 대문 위로 연분홍 꽃이 피면 대문은 봄의 갤러리가 된다. 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고 넘칠 듯 흐드러진 봄을 담아두는 거대한 '봄의 꽃병'이 된다.


봄은 사람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봄 앞에서 우리는 저마다 한 번씩은 기어이 걸음을 멈추고 만다.

보도블록 사이에 핀 샛노란 민들레를 보기 위해 허리를 구부리고 커다란 모과나무 모과꽃을 보기 위해 허리를 한껏 뒤로 젖혀본다...

날 것의 아름다움 앞에 우리의 관념 속에 박힌 세속의 아름다움이 무력해진다.

봄은 거대한 화관이 되어 우리를 모두 빨아들인다.


<헤게모니>


헤게모니는 꽃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헤게모니는 저 바람과 햇빛이

흐르는 물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내가 지금 말하고 있지 않아요?

우리가 저 초라한 헤게모니 병을 얘기할 때

당신이 헤게모니를 잡지, 그러지 않았어요?

순간 터진 폭소, 나의 폭소 기억하시죠?)

그런데 잡으면 잡히나요?

잡으면 무슨 먹을 알이 있나요?

헤게모니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편한 숨결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숨을 좀 편히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검은 피, 초라한 영혼들이여

무엇보다도 헤게모니는

저 덧없음이 잡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우리들의 저 찬란한 덧없음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정현종-


"우리들의 저 찬란한 덧없음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봄의 헤게모니 앞에.... 검은 피, 초라한 영혼들은 한없이 찬란하고 한없이 덧없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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