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사람이면서 푸들이거나 푸들이면서 사람일 수는 없다
사람일까 푸들일까
하지만 사람이면서 푸들이거나 푸들이면서 사람일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는가가 사물의 특징을 규정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면 “사물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물에 어떤 의미를 끊임없이 부여하는 것”이다.
눈이 내린 숲. 배낭을 멘 누군가가 숲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아마도 쫓기는 것인지, 길을 잃은 것인지,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눈 길을 달리고 있다. 나는 흑백으로 된 이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젊은이 일 것, 남자일 것, 배낭을 메고 있는 상태, 절박하고 중요한 이유 등을 연상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건 개(푸들), 어두운 색깔의 털을 지닌 개 한 마리가 눈 덮인 숲 속에서 달려 나오고 있는 사진이라 해석했다. 아마도 개가 달려오는 앞에는 함께 겨울 숲을 산책 나간 주인이 웃으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을 것이라 했다.
관점의 차이... 숲 사이로 달려오거나(달려가거나) 하는 피사체를 두고 사람과 개로 생각이 나뉜다. 털이 북술거리는 푸들이라 생각하고 다시 들여다보니 정말 눈 길을 헤치고 달려오는 '개'가 틀림없다.
사람은 같은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더라도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사람’ 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의식에도 어떤 편견이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나는 ‘젊은 남자’ 일 것이라 생각했을까? 젊은 여자일 수도 있고,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일 수도 있다. 모자를 쓰고 배낭을 멘 채 달려가는 것은 젊은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말이다.
비트겐 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도 마찬가지다. 토끼의 귀에 집중하면 토끼로 보이지만 그것을 튀어나온 길쭉한 부리로 생각하고 바라보면 오리로 보인다. 단 ‘오리이면서 토끼’ 혹은 ‘토끼이면서 오리’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눈 내리는 숲의 사진도 ’ 개이면서 사람‘이거나 ’ 사람이면서 개‘로 볼 수는 없다.
어떤 애매모호한 사진이나 그림을 제시하고 사람의 심리를 테스트하기도 하는데 위의 눈 내리는 숲 사진에서 피사체를 ‘숲으로 달려가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각에 익숙한 사람이고, ‘숲에서 달려 나오는 개’로 바라보는 사람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고 환경심리학자 리 체임버스는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착시 효과는 불안한 심리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심리가 불안한 상태일수록 배낭을 멘 사람으로, 낙관적이고 긍정적일수록 주변 환경보다 개를 먼저 발견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반려동물로 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눈 밭에서 달려오는 피사체가 당연히 귀여운 장난꾸러기 푸들로 보일 확률이 높을 것이고 겨울 산행이 취미인 등산객들에게는 당연히 산행 중인 등반자로 인식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사람의 삶도 그 사람이 머무는 환경. 전후 ‘맥락’으로 해석되는 존재다. 어떤 상황만 뚝 떼어내면 누구든 이상한(?) 사람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오늘 하루. 나는 내 삶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리일까? 토끼일까? 배낭을 메고 숲으로 달려가는 사람일까? 숲에서 달려 나오는 푸들일까?
‘무엇’이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 일 수 없는 삶이다.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다른 나’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는 마음에 드는 ‘나’가 되기도 하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나’가 되기도 한다. 냉철한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기도 했다가 한 번에 무너지는 연약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결국 나는 ‘나’다. 푸들로 보이든 배낭을 멘 사람으로 보이든 분명한 것은 ‘눈 내린 숲’에 존재하는 피사체‘라는 것은 분명하듯이...../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