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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가루는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의 작품을 중심으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몽마르트 언덕 노르벵 거리에는 마르셀 에메 광장이 있다. 사람 하나가 건물 벽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듯한 모습의 동상이 있는데 바로 마르셀 에메의 동상이라고 한다. 에매는 판타지적인 효과를 사용하면서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세계의 현실성을 견실하게 유지한다. 반점의 묘미를 잘 살린 '짧은 이야기' 속에 익살스럽고 특이한 인물, 간략하면서도 신랄한 스토리, 위트와 아이러니를 적절하게 뒤섞는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생존 시간 카드', '속담', '칠십 리 장화', '천국에 간 집달리' 4편의 대표작이 수록되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얻은 기지와 절제가 그의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파리 몽마르트르 오르샹가 75번지 2호의 4층에 매우 선량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뒤티유욀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치 열린 문을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그것이었다. 43살의 뒤티유욀이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알게 된 것은 독신자 아파트에 전기가 나갔을 때였다. 의사는 진찰 결과 갑상선 협부 상피의 나선형 경화가 원인이므로 일을 많이 하여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라고 충고하며 쌀가루와 켄타우루스호르몬 혼합물인 4가 피레트 분 정제를 일 년에 두 알씩 먹으라는 처방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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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티유욀은 레퀴예라는 신임과장과의 불화를 계기로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고 ‘가루가루’라는 가명으로 은행이나 금은방 같은 곳을 털어 하루아침에 신문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가 된다. 벽을 드나드는 그의 능력은 벽들을 뚫고 지나가고 싶은 욕망에 불을 지피고 가루가루라는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 초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직장 동료들이 신문을 보며 가루가루를 칭찬하자 조심스럽게 자신이 가루가루임을 밝히지만 도리어 조롱을 당한다. 자신이 가루가루임을 입증하기 위해 일부러 파리 시내의 보석가게를 털다가 야간 순찰대에 붙잡힘으로써 존재를 드러낸다.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벽을 드나드는 능력 때문에 수감은 무의미하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외모를 바꾸고 이집트 피라미드 여행을 준비하던 중 어떤 금발의 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밤 10시쯤 노르뱅거리 그녀의 집 벽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누는데 다음날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자 오래전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아스피린으로 착각하고 먹는다. 밤이 되자 들뜬 마음으로 다시 그녀의 집 벽으로 들어가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고 그녀 집을 떠나는 중 벽돌 틈 사이에 갇혀버린다. 어떤 유체 같던 물질이 반죽처럼 끈끈해지더니 온 몸이 굳어가는 것, 오래전 의사의 처방이 과도한 힘을 쓴 결과와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늑대인간 뒤티유윌은 꼼짝없이 담벼락에 갇혀 버려서 지금도 여전히 야심한 시각에 파리 노르뱅 거리 근처 벽에서는 희미한 탄식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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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시간 카드>는 작가 쥘 플레그몽의 일기 형식으로 작성된 단편 소설이다.

당신에게 하루 24시간이 아닌 당신의 쓸모에 따라 일정한 시간을 책정하여 카드로 발급해주고 쓸모가 인정되지 않는 시간은 비존재의 상태로 있어야 한다면 당신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정부는 비생산적 소비자 -- 노인, 퇴직자, 실업자, 예술자, 작가 -- 등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배급제 실시한다. 생존시간을 최대로 줄이자는 의도다. 부랑자, 노숙자, 노인, 장애인, 매춘부....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의 리스트를 작성하여 생존시간 카드를 발급해준다. 작가나 예술가도 그 범주에 속하게 된 것을 알고 쥘 플레그몽은 당황하지만 주어진 시간을 담담히 사용하려 한다.

70대의 로캉탱 노인은 24살의 젊은 아내와 생존시간의 차이로 자주 헤어져 있어야 한다. 그 사이 젊은 아내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생존시간 카드를 은밀히 거래하는 사람들로 넘치고... 사랑을 약속했지만 생존 시간의 차이로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는 사랑했었다는 사실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황당한 일도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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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에메의 작품 중 ‘생존시간 카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국가가 나의 ‘쓸모’에 따라 내게 ‘생존시간’을 책정하여 카드로 발급해주고 나는 24시간을 오롯이 쓰지 못하고 카드에 적힌 시간만 생존할 수 있다면.... 나머지 시간은 현상계에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비존재의 상태로 있다가 다시 생존시간이 허락된 순간에 존재자로 돌아온다면...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사람의 ‘쓸모’를 국가 기관이 책정한다는 것... ‘쓸모 있음’의 판단 기준 또한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일 것이다. 에메의 작품을 통해 ‘생존시간’에 대한 고민을 해본다. 사실 사람의 수명은 명부에 작성된 것이 아니다. 과학적으로는 염색체의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는 것과 인간의 수명이 관련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는지 그대로인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확인할 수 없다.

내게 생존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기에 좀 더 주어진 시간을 맹렬히 살아야 한다.


본문 중에서

쓸모없는 사람들, 곧 '부양을 받고 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소비자들'의 무리에 놀랍게도 예술가와 작가가 포함된다고 하지 않는가! -40쪽 -

열흘 전부터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이 분주하다.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밤잠을 잊을 지경이다. 글을 쓰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 정상적인 삶을 살 때 석 주나 걸려서 쓴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원고를 최근에는 나흘 만에 해치웠다. 그런데도 문체에선 전과 다름없는 광채가 나고 사유에는 변함없는 깊이가 있다. 쾌락을 추구할 때도 그와 똑같은 열의로 정력을 쏟고 있다. 세상의 예쁜 여자들을 모두 나의 여자로 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또 암시장에서 매일 두 끼씩 아주 푸짐한 식사를 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온전하게 활용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복수심에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47쪽

그녀가 삶에서 일시적인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녀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그치며 눈앞에서 그녀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떤 마술사가 그녀를 감쪽같이 숨겨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정적이 밀려와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꽤나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다. --51쪽

자기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겠다는 그의 제안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식인귀(食人鬼)나 사람을 공물로 받았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55쪽 -

나는 영벌을 받은 영혼처럼 고통을 겪고 있다. 이 고통의 끝에서 잘 팔릴 책이나 한 권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 -71쪽


그의 다른 단편 <속담>에서 가부장적인 자코탱씨의 모습을 통해 한 가정의 식탁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에피소드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문화훈장 수여자 '라는 자랑을 하고 싶은데 막상 식탁에 앉아 가족들을 바라보니 모두가(자신을 제하고) 한심하게 보인다. 아내는 늙고 초라해 보이고 두 딸은 겉멋만 잔뜩 들어 보이고 나이 든 고모의 치료비 부담을 생각하니 더 분노를 느낀다. 어린 아들 뤼시앵에게 갑자기 숙제를 했는지 안 했는지 따지기 시작하고는 급기야 직장 동료의 아들과 비교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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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과 관련된 아들의 작문 숙제를 밤새 대신해주고 내심 열등생인 아들이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리라 기대한다. 결과는 20점 만점에 3점으로 최하위 점수를 받았고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 앞에서 작문 수준이 형편없다고 비난한다. 뤼쉬앵은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식탁 앞에서 아버지 자코탱씨의 기대에 찬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20점 만점에 13점. 최고점을 받았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그 말을 진실로 안 아버지는 감격하며 아들에게 다음 숙제도 자신과 꼭 함께 하자고 다독이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있을 법한 소재임에도 다 읽고 나면 어딘가 마음이 아려온다. 부모로서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본문 중에서

자기의 정치적 신념에 비추어 차마 군비 확대를 정당화하는 그런 편향된 예를 선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거였다. 그는 너무나 정직해서 자기의 소신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해낸 그 소재를 버린다는 건 어쨌든 아까운 일이었다.-91쪽 -

"그래, 어서 베껴라."

그렇게 말하는 자코탱 씨의 어조에는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아도 되는 부차적인 활동에 대한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95쪽 -



또 다른 단편 <칠십리 장화>는 제르멘 뷔주의 아들 앙투안이 칠십리 장화를 갖게 된 이야기다. 다른 친구들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앙투안의 집안 형편. 하루에 칠십리를 갈 수 있다는 마법의 장화는 앙투안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유혹거리다. 판매 가격은 3000프랑, 생각할 수도 없는 비싼 가격이기에 앙투안과 친구들은 몰래 그 장화를 가져오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사고를 당해 모두들 입원한다. 가정 형편이 부유해도 그 장화를 소유하려는 아이들 때문에 덩달아 그 아이들의 부모도 장화에 욕심을 낸다. 제르멘 뷔주는 오직 앙투안이 그 장화를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 가게를 찾아가는데 정말 뜻밖에도 25프랑에 칠십리 장화를 사 올 수 있게 된다.


"칠십리 장화를 신은 앙투안은 행복감에 부풀어 오르고 슬퍼 보이기만 하던 새 벽지도 봄날의 풋사과처럼 예뻐 보였다. 그날 밤 어머니가 잠이 들자 아이는 소리 없이 일어나 옷을 입고 칠십리 장화를 신었다. 아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붕 밑 방을 더듬더듬 가로지른 다음 긴 시간을 들여 조심조심 창문을 열고 처마의 물받이 가장자리로 기어 올라갔다. 아이는 한 번의 도약으로 파리 교외에 다다랐고, 두 번째 도약으로 센느 에 마른 지역에 이르렀다. 그렇게 십 분을 가자 지구의 반대편이 나왔다. 아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걸음을 멈춘 다음 아침 햇살을 한 아름 따서 ‘성모 마리아의 실’로 묶었다.

앙투안은 지붕 밑 방을 쉽사리 다시 찾아내어 살그머니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이는 찬란한 아침 햇살 다발을 어머니의 작은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 빛이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피곤이 덜어지리라고 생각했다./ p 154 "


칠십리 장화를 신은 앙투안이 가져온 것은 금은방의 보석도 아니고 이집트 파라오의 보물도 아니고 은행 금고의 돈도 아니고 양식과 옷도 아니었다. 앙투안은 찬란한 아침햇살을 가져와 어머니의 머리맡에 놓아주었다. 앙투안과 어머니의 삶이 햇살처럼 밝아질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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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에메의 단편들을 읽어보니 그가 왜 프랑스의 국민작가란 칭호를 받는지 이해가 된다. <벽을 드나드는 남자>도 1940년대의 작품인데 지금 읽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들은 웃음을 주면서 동시에 슬픔을 느끼게 한다. 마르셀 에메는 사랑, 고독, 가족, 빈곤, 우정, 편견, 결핍, 행복에 대한 것들을 이토록 흥미롭게 풀어놓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벽에 갇힌 채 울부짖고 있는 가루가루의 동상이 있다는 몽마르트르 언덕...

나는 이런 상상력을 구체화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프랑스의 예술을 동경한다.

마르셀 에메의 작품을 만나는 시간. 나에게 허락된 생존 시간을 생각해보는 밤이기도 하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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