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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이 적용된다면....

씀에 대하여


아마도 씀에 대한 최초의 즐거운 기억은 어린 시절 국어시간에 쓴 글이 교실 뒤편 우리들의 솜씨에 붙어있던 때가 아닐까 싶다. 빨간 격자 속 내 글들은 왠지 그럴듯해 보였다.

아버지는 방학 때마다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독서캠프를 진행하셨다. 숙제로 내준 수많은 글들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일일이 피드백을 주어야 했는데 너무 바쁘신 나머지 가끔 내게 학생들의 원고 뭉치를 건네주고 상, 중, 하로 수준만 분류해달라고 하셨다. 탁월한 안목을 지니지도 않은 내가 어떤 기준으로 상, 중, 하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상, 중, 하로 거칠게 대충 분류된 글을 순서대로 보고 아버지가 다시 재분류를 하시고 첨삭 지도를 하셨다. 그때의 나는 말하자면 기초, 예심 심사원이었던 셈이다. 돌아보면 방학 때마다 그 엄청난 원고 뭉치들을 바라보고 수준을 가늠하던 것이 내 문학 수업의 첫 단계가 아니었나 싶다.


청소년기, 성인이 되어서도 부단히 글을 썼던 것은 나를 치유하거나 위로하기 위한 혹은 의지를 다잡기 위한 용도이기도 했다. 글을 써서 무슨 문학상을 받아야겠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문예창작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아무런 목적 없이 글을 쓰고 오롯이 순수하게 내 지난날의 유산으로 남아있는 게 도리어 좋다. 글 속에 숨은 지난날의 나를 만난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얼룩은 눈물이거나 침이거나 커피의 흔적일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바로 그 날의 기록도 있다. 그 황망한 시간에도 나는 글을 쓰지 않으면, 무언가 남기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었나 보다.

기록한다는 것.... 가끔 사극 속의 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사관’이지 않았을까 싶다. 왕의 일거 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 너무 거짓 없이 정직하게 썼다가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고지식한 사관 말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고통이기도 하다. 하루가 멀게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유명한 이들의 책도 있고 이름도 잘 모르는 이의 책도 있고..... 현대 사회의 시류에 맞게 기획된 책들도 있다. 책..... 책으로 넘친다.

불황이니, 경기가 어렵니 말을 하지만 책에 빠진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건 책을 구매한다. 때론 구매한 책이 전부다 마음에 드는 게 아니어서 후회가 밀려올 때도 있다. 고도의 광고 전략에 속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도서관에 신간도서 코너에 가면 뜨끈뜨끈한 신간 도서들이 있다. 누군가 펼쳐주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몸짓들. 어떤 책은 베스트가 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존재감 없이 도서관 서고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지새운 불면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원고 뭉치를 들고 여기저기 출판사를 기웃거려 몇 번의 퇴짜를 당하고 어렵게 나온 책도 있을 테니... 솔직히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책인데도 단지 저자가 유명한 베스트 작가라는 이유로 대충 나온 책들도 있다.

작가... 어느 순간 나는 ‘작가’라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호칭이 되었다. 등단을 했으니 ‘작가’인 게 맞고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발행하는 것도 ‘브런치 작가’라는 자격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어느 순간 ‘작가’라는 말은 내게 ‘광대’라는 말처럼 희화화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진정한 작가가 대체 몇이나 될지, 물론 '진정한'의 의미 또한 모호하다. ‘진정한’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책을 잘 팔리지 않는데 책을 내려는 이는 많은 현실.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한결 같이 놀랍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이보다 글을 쓰고 책을 내려는 이가 더 많은 것 같은 현실에.

책을 많이 읽는 이들이 글도 쓰고 책도 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창작 기금을 수혜 했으니 당연히 부지런히 글을 쓰고 좋은 원고가 완성되면 여기저기 출판사에 투고하는 게 순리지만 요즘의 나는 ‘작가’라는 말이 주는 중압감이나 희화화된 느낌이나 책임감이나 가식이나 그런 복잡한 양가감정들에 쌓여 제자리 걸음 중이다.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고 누구든 책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글들의 홍수 속에 좋은 글을 만나기란 어렵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좋은 것들이 많이 차있어야 한다. 좋은 것들을 가득 채워두어야 스스로 넘쳐서 좋은 글이 나온다. 다독, 다작, 다상량. 많이 읽어 채우고, 많이 생각해두어야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고 기본적인 말이지만 늘 변함없는 진리처럼 여겨진다.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이 있는데

"식물의 생산량은 생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원소 또는 양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법칙이다. 어떤 원소가 최소량 이하인 경우 다른 원소가 아무리 많이 주어져도 생육할 수 없고, 원소 또는 양분 가운데 가장 소량으로 존재하는 것이 식물의 생육을 지배한다는 주장이다."

( 1843년에 독일의 리비히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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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다른 원소와 양분이 충분하더라도 생육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분이나 원소가 식물의 생육을 결정한다는 법칙은 글쓰기에 적용하면 아무리 많은 글을 쓰고 아무리 많은 경력을 쌓고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와 능수능란한 글 솜씨, 아무리 많이 읽어 뛰어난 해박함을 지니고 있더라도 글쓰기에 꼭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되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글쓰기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무엇’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열정, 정직, 성실, 체력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글쓰기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초심’이라 생각한다. 어린 날 교실 뒤편 게시판에 걸린 붉은 원고지에 적힌 내 글. 설레고 두근거리던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을 생각한다.

잘 팔리고 잘 나가는 글을 쓰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당연한 것이지만 부끄럽지 않은 글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쏟아지는 책들 사이... 누구든 작가가 될 수 있고, 되고 싶어 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씀’이 주는 오롯한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무슨 상을 받기 위함도. 베스트 책의 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닌 오직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의 몸짓, 비 온 뒤의 청명한 하늘을 기록하는 일.

나무와 나무 사이 새들의 비상을 바라보는 일,

종이 위를 달리는 연필의 경쾌한 발소리에 집중하는 일, 자판 위 손가락들의 즐거운 춤을 기억하는 일.........

어쨌든 '씀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일/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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