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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거룩한 불꽃

<브런치 x 저작권 위원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 : 글 부문

<브런치 x 저작권 위원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성냥팔이 소녀) : 글 부문 응모작입니다


“할머니, 여기는 어디예요?”

“성냥 나라란다.”

“저는 죽은 건가요?”

“아니란다. 애야. 사람들은 네가 추위를 견디다 못해 성냥을 모두 켜고 얼어 죽은 거라 생각하겠지만 너를 이곳으로 오게 하는 방법은 네가 지닌 성냥을 모두 태우게 하는 것밖엔 없었단다. 그래야 성냥 나라로 들어오는 문이 열리거든, 너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을 잊고 새로운 삶을 주고 싶었지.”

“성냥 나라에서는 더 이상 성냥을 팔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럼, 이곳 사람들은 몸 안에 이미 성냥들이 가득 차 있단다. 우리는 매년 한 해의 마지막 날 불꽃의 기운으로 다음 해를 선물 받지.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내는 이를 불꽃 여왕으로 추대하기도 해. 거룩한 ‘매치’를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지. 이곳에서 넌 헤르미느로 다시 태어났단다.”


북극 아주 외딴곳에 성냥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마다 12월 31일 밤 지구 밤하늘을 비추는 거대한 불꽃들은 모두 성냥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성냥 나라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 날 몸 안의 성냥들을 모두 태워 불꽃을 만들고 피워낸 불꽃에 따라 다음 해를 살아갈 성냥을 받게 됩니다. 어떤 불꽃색일지는 성냥에 불이 붙은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지만 성냥 나라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불꽃들은 1년 동안 살아온 삶의 순정한 흔적들이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마어마한 폭설이 내려 몸 안의 성냥들이 전부 젖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젖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몇몇이 불씨를 티워 눈에 파묻힌 성냥 나라 사람들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날 모두 광장에 모며 몸 안의 성냥들을 태워 그들을 기억하고 불꽃 신에게 다음 해의 축복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불꽃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성냥 나라 사람들이 몸 안에 아무리 많은 성냥을 지니고 있더라도 단 한 번도 불꽃을 일으키지 못하면 성냥들은 불꽃을 일으키는 능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자기 몸 안의 성냥에 불을 지펴줄 파트너를 ‘매치’라 부르는데 가장 거룩한 ‘매치’의 존재에 대해 어떤 이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도 했고 또 어떤 이는 귀공자라 했고 어떤 이는 새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도 했습니다. 올해 축제 기간 동안 거룩한 ‘매치’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두의 관심사였습니다.

성냥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불꽃 축제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몸 안의 성냥에 불꽃을 일으켜줄 매치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어렵사리 파트너를 구해와도 발화점이 맞지 않아 불꽃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제대로 불꽃을 일으키지 못하면 어딘가로 사라져 ‘목소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형체 없는 목소리들은 사람들에게 성냥개비를 구걸해 어느 정도 모이면 다시 몸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불꽃 축제 날은 생성에 대한 기대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날이었습니다.


헤르미느도 자기 안의 성냥이 잘 타올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피울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헤르미느가 전설의 ‘매치’를 만나기만 한다면 가장 아름다운 불꽃을 피울 거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하는 헤르미느의 귀에 “성냥 주세요. 제발 한 개비만 주세요."라는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헤르미느는 성냥 한 개비가 목소리에게 가 닿기를 기도했습니다. 헤르미느의 몸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빠져나갔습니다. 헤르미느는 자꾸만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큰 목소리, 작은 목소리, 속삭이는 목소리, 흐느끼는 목소리, 울부짖는 목소리, 헤르미느는 목소리들에 집중했습니다.

“성냥 한 개비만 있다면....”헤르미느가 목소리들에 응답할 때마다 헤르미느의 몸에서 성냥이 하나씩 빠져나갔습니다. 누군가에게 불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성냥을 나눠주면 노화 속도가 빨라지기에 성냥 나라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외면했습니다. 아름다운 헤르미느가 성냥 하나씩을 건넬 때마다 점점 더 나이를 먹어갔습니다. 하루하루 헤르미느의 모습은 눈에 띄게 변해버려서 친구들조차 헤르미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은 겉으로는 헤르미느를 동정하면서도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어리석은 헤르미느 같으니...’ ‘이번 불꽃 축제 여왕 선발에서 헤르미느가 빠지니 얼마나 다행이야.’ 친구들은 이미 자신에게 어울릴 파트너를 구했습니다.


바득바득 축제일은 다가오는 데 헤르미느는 여전히 성냥을 원하는 목소리들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헤르미느에겐 이제 성냥이 몇 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검고 윤나는 머리는 어느새 새하얗게 변해버렸고 허리는 구부정해졌으며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들었습니다. 대회 당일 불꽃을 피우지 못하면 헤르미느도 ‘목소리’로 변해서 다른 이들에게 성냥을 구걸해야 할 운명이 될지도 모릅니다. 헤르미느에게는 이제 마지막 성냥 한 개비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선뜻 헤르미느의 파트너가 되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매치’를 만날 확률도 거의 없었습니다.


드디어 불꽃 축제가 열리는 날, 광장으로 성냥 나라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광장 입구 계단 아래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망토를 둘러쓴 사내가 손만 내밀고 성냥 한 개비만 달라고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아닌 실체가 있는 사람이 성냥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성냥 나라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앞을 지나치면서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 그새 성냥을 낭비한 거야?’ ‘목소리로 변해버리든 말든 나완 상관없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오늘은 가장 중요한 불꽃을 피워야 하는 데 성냥을 한 개비도 나눠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사내를 외면했습니다. 하늘에 눈구름이 가득했고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저마다의 불꽃들이 모여 하늘로 솟아 올라 차가운 눈보라를 이겨내도록 불꽃 신에게 기원했습니다.


늙은 헤르미느도 축제가 열리는 광장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축제장 입구에서 누군가가 성냥 한 개비를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성냥 한 개비를 달라는 목소리만큼은 또렷이 들려왔습니다.

“네 그래요, 제게 남은 마지막 성냥개비예요. 축제에 참가할 최소한의 것이지만 이젠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당신에게 마지막 성냥개비를 준다면 내 삶도 소멸해버리겠지요. 당신에게 마지막 남은 성냥을 주기 전 소원이 있어요. 축제가 열리는 광장까지, 그 무대까지라도 가보고 싶어요.”

하늘로 거대한 불꽃들이 솟아오르고 불꽃들이 또 다른 불꽃들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끝내 불꽃을 피우지 못하고 목소리가 되어버린 이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가장 강력한 불꽃을 일으켜 줄 거룩한 ‘매치’를 기다렸습니다. 해마다 축제 날, 자정 무렵, 어디선가 매치가 나타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불꽃을 점화시키고는 유유히 사라지곤 했습니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검은 망토의 사내는 노쇠한 헤르미느를 부축해 광장 무대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검은 망토를 입고 구걸하던 사내와 늙은 여자가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무대는 거룩한 ‘매치’가 나타날 신성한 곳이었기에 야유를 퍼붓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검은 망토의 사내와 헤르미느가 무대 한 중앙에 서자 갑자기 거대한 불꽃이 생겨났습니다. 성냥 나라를 삼키고도 남을만한 불꽃들이었습니다. 하늘 가득 불꽃들이 생성되는 동안 헤르미느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구걸하던 사내가 바로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거룩한 ‘매치’였음을 알았습니다. 거룩한 ‘매치’는 성냥 나라 사람들에게 헤르미느의 아름다운 희생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검은 망토의 사내 모습으로 나타난 거룩한 ‘매치’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뜨거운 불꽃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삼키고 있었습니다.


헤르미느가 새 해의 불꽃 여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불꽃 여왕이 된 헤르미느는 성냥 한 개비를 달라는 목소리들을 여전히 외면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노화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불꽃 축제가 열리는 날 자정, 성냥 나라로 들어오는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지구 어딘가에서 여전히 성냥을 파는 소녀들이 있다면 모두가 잠든 시간 저마다의 불꽃을 타고 성냥 나라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있을 것이고 그 꿈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지상에서 ‘성냥팔이 소녀’라 불리던 그녀가 성냥 나라의 불꽃 여왕이 되어 거룩한 불꽃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끝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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