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의 <섬>과 정현종의 <섬> 그리고.....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읽고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껴안고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 까뮈
장 그르니에의 『섬』을 처음 읽던 때. 오로지 까뮈의 글 때문이었다.
조그만 책의 처음 몇 줄을 읽다 마고 가슴에 껴안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읽기 위해 자신의 방까지 한 걸음에 달려가던 까뮈의 어느 저녁을 생각한다. 해마다 여름을 보내기 전 장 그리니에의 『섬』을 다시 꺼내 든다.
그의 책은 내게 여전히 여름임을 입증하는 여름 입문서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먕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 한 인간의 존재가 그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점진적일 수도 있다....
공(空)의 매혹이 뜀박질로 인도하게 되고 우리가 한 발을 딛고 뛰듯 껑충껑충 이것저것 에로 뛰어가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공포심과 매혹이 한데 섞인다.(.....)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도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 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공의 매혹’ 중에서
어린 날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 기억이 누구나 한 번은 있을 것이다. 파란 여름 하늘 위로 구름들이 뭉치고 흩어진다. 순식간에 충만해지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그 하늘. 누구나 한 번은 올려다보았을 하늘이 한 여름날 마루에 누워 바라보면 전혀 색다른 하늘처럼 보인다.
그 하늘을 보던 어린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마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 차창으로. 베란다 유리창으로 흘낏 바라보고 만다. 여름 하늘에 어떤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어떤 ‘특별함’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아온 시간은 어떤 특별함을 잃어버린 시간들 인지도...
“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거나 (.....)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 -중략 -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 케르켈 렌 군도’ 중에서 발췌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 있을 때 나는 자유로워진다. 익명의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익명의 나로 살아도 된다는 묘한 해방감을 준다. 이름조차도 정보나 단서가 될 수 없는 낯선 곳... 나 아닌 나. 아니면 본래의 나로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돌아보면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때 그런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h 중 임시교사를 시작하던 20대의 어느 날... 먼지가 풀풀 날리던 황톳길로 버스가 달렸다. 장을 본 물건들을 한 보따리 들고 있는 사람들... 도회에선 본 적이 없는 낯선 풍경들이었다.
이목마을 앞 버스 정류장. 토요 수업이 끝나면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움직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들려온다. 태양으로 이글거리는 시골길..
그곳에 처음 가던 날. 나는 도시를 떠났다는 해방감에 안도를 느꼈다. 새로운 삶의 시작. 설렘 같은 것... 아주 오래전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모든 것은 희미해져도 뽀얀 흙먼지를 날리던 황톳길과... 어린 학생들의 재잘거림.... 귀를 파고 들어오는 남도 사투리.. 어쩌면 그곳은 내 젊은 날. 하나의 ‘섬’과도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이란 왜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행운의 섬들’ 발췌.
일상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기 위하여 장 그르니에는 여행을 한다고 답한다.
일상. 주어진 것들. 늘 같은 위치, 같은 시간과 공간에 맞추어진 사람들.
여행은 그것들로부터의 탈출이다. 비록 돌아오게 되더라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동안 우리가 거쳐야 할 고독들 속에서 각별한 장소들과 순간들.
어떤 특별한 장소들과 순간들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충만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많은 곳을 가지 않더라도 어떤 장소와 순간들이 공명하는 곳이 많다면 그 또한 충만한 삶을 살아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정현종 시선집 『섬』에 수록된 그의 시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아주 짧은 2행의 시. 군더더기 하나 없으나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섬’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문득 ‘섬’이라 이름 지은 이가 궁금해진다
우리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얼마나 많은 섬들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 섬에 가고 싶다.
일상에서 졸고 있는 감성을 일깨우기 위해서...
사라져 버리는 아득한 모든 것들을 부여잡기 위해서...
그 섬에 가고 싶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