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그러한 것'을 찾기 위하여
야드비가의 꿈/본디 그러한 것들을 찾으러 간다
앙리 루소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꿈'은 야드비가의 꿈을 그린 작품인데 소파에서 잠든 야드비가가 정글로 옮겨진 꿈을 꾼 것을 형상화했다. 문명의 상징인 소파 위에 벌거벗은 야드비가가 누워있다. 초록 잎 사이사이로 동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정글은 화가 루소의 상상력이 빚어낸 공간이다. 세밀화를 보는 것처럼 섬세하고 정교한 묘사는 세상 어딘가에 인간의 손 때 묻지 않은 이런 정글이 존재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꽃과 열매와 풀과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는 동물들 사이에서 벌거벗은 야드비가. 자연 그대로 누워있다. 빽빽한 원시림 같은 정글 속 야드비가의 소파는 낯설다. 인간의 것이 인간의 것이 아닌 '정글'에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만든 침대 위에서 야드비가는 인간의 것이 아닌 정글을 바라보고 있다. 동물들은 야드비가에게 무관심하며 정면이거나 측면이거나 자신들의 시선 닿는 곳 어딘가를 응시한다.
나뭇잎 사이에서 피리를 부는 인물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그림 속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억압되지 않은 모습, 본디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자연. 노자는 ‘자연’을 ‘self -so’ 본디 그러한 것이라 했다. 자연은 저마다의 색깔과 언어로 존재하는 본디 그러한 것이다. ‘본디 그러한 것’ 본디 그러한 것이라는 의미에는 그것의 원형이 들어있다. 지금의 나는 ‘본디 그러한 나’의 모습인가?
일체의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채로 원시림 속에 자신을 놓아둔다면 ‘본디 그러했던 내 안의 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내가 있고 젊은 날의 내가 있고 숫자를 부인하고 싶어지는 나이의 내가 있다. 언젠가는 내가 나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내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림 속 야드비가가 되어본다. 모든 인위를 거부한 그녀가 꾼 꿈속 풍경의 일부일지라도...
작품 제목은 <꿈>이지만 야드비가의 꿈인지, 루소의 꿈인지 알 수 없다. 야드비가의 꿈을 그린 작품이라 하지만 루소의 꿈인지도 모른다. 루소는 작품 속 진초록 풀일 수도 있고 꽃일 수도 있고 정면을 응시하는 동물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야드비가의 침대일 수도 있다.
꿈이란 대체 무엇일까? 밤 사이 뇌가 그린 흔적들이다. 꿈은 때로 낯선 것들의 조합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같은 이야기 선상에 등장한다. 꿈을 꾸는 동안 꿈을 꾸는 자신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등장인물과 장소로 자신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꿈속에서는 잠재된 욕구들이 일어나 춤을 춘다. 억눌린 욕망과 가식으로 포장된 낮의 얼굴이 밤이 형상화한 공간에서는 ‘본디 그러한’ 채로 드러난다.
작품 속 야드비가처럼 원시 욕망의 꿈을 꾸고 있다. 억눌려있으나 존재하는 것들을 품고 깊고 깊은 정글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우리 안에는 야드비가가 산다. 태고의 정글에서 야드비가는 본디 그러한 '날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할 수 있다면 그리되고 싶다. 가식과 인위를 던져버리고 부끄러움 없는 본래의 나로.
사람 키의 몇 배가 되는지 모를 거대한 초록잎 사이로 난쟁이 같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들 무리 중 하나가 되어 본디 그러한 '생'을 응시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본디 그러한 생에 대해 생각한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생이 피리 소리 끝에서 흘러나와 짙은 초록잎 사이 어디선가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