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크리스티나의 세계
. 단 한 줄로도 희망을 연주한다/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은 인간의 꿈
지구처럼 보이는 동그란 구 위에 연둣빛 옷을 입은 여인이 줄 끊어진 리라를 연주하고 있다. 여인의 눈은 흰 붕대로 가려져 있다. 실명한 것인지 상처를 입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줄은 거의 끊어진 것처럼 보이고 몸통만 겨우 남아있는 리라를 여인은 부둥켜안고 연주를 하고 있다. 평지도, 보드라운 잔디 위도, 꽃밭도 아닌 애매모호한 구체 위에 앉아 있다. 게다가 조난당한 사람처럼 맨발이다. 누군가 이 작품의 제목을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 '절망' 혹은 '좌절' 혹은 '슬픔'이라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의 제목은 <희망>이다.
19세기 영국 상징주의 화가 조지 프레데릭 와츠의 작품 <희망> 연작 중 하나다. 와츠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금의 줄 4개는 모두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 간신히 붙어있다. 동그란 구체는 지구를 두 눈을 가린 여인은 위태로운 인류의 모습을, 리라의 끊어진 4줄은 절망을 간신히 남아있는 마지막 한 줄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희망'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은 인간의 꿈'이라고 했다. 꿈을 꾸는 것은 잠을 자는 동안 가능한 일이지만 희망을 꾸는 일은 잠을 자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라는 의미다.
희망을 품는다는 말은 지금 여기에 희망이 없다는 반증일 것이다. 희망이 우리 주위에 넘친다면 우리가 희망을 굳이 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희망이 없기에 희망을 탐할 수 있다. 돌아보면 희망에 주린 사람처럼 늘 희망을 탐하며 살았다. 희망이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일까 희망은 있는데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단 하나의 줄로 리라를 연주하는 여인, 온전한 연주가 될 리 없다. 앞은 보이지 않고 막막하다.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간신히 걸치고 있는 허름한 옷과 줄 끊어진 리라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인의 모습에서 희망을 생각한다. 품에 안은 리라가 전부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연주다. '희망'이란 바로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닐까. 우리는 들을 수 없는 리라 소리를 가장 처절한 슬픔을 품고 있는 여인. 보지 못하는, 볼 수 없는 여인은 가슴 깊숙이 들려오는 희망의 리라 소리를 듣고 있다.
*리라(lira) : 기원전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시리아에서 쓰인 발현악기로, 후에 고대 그리스에서 키타라와 함께 가장 신성한 악기로 중요시되었다
* 희망은 '결핍'에서 시작된다/ 크리스티나의 세계 (앤드류 와이어스)
한 여인이 농가를 향해 가고 있다.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달려가는 것도 아니고 기어가고 있다. 두 손이 크리스티나의 앞발이 된 지 오래다.
하반신 마비인 크리스티나가 가고 있는 것인지 멈추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멀리 보이는 농가는 그녀의 집이다.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크리스티나가 기어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크리스티나의 시선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돌아가야 할 집, 머물러야 할 집이 크리스티나에게는 왜 그리 멀어 보이는 것일까?
현실은 절망을 생각하기엔 희망을 생각나게 하고 희망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절망스럽다.
살아간다는 일은 희망과 절망의 변주라는 것을 안다. 절망의 현실은 희망을 꿈꾸게 하지만 크리스티나에게 희망이란 두 손과 두 다리에 한정되어 있다.
크리스티나는 두 손과 두 다리로 흙을 밀고 가는 온몸으로 희망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모든 것이다.
메인주 커팅에 있는 크리스타나의 '올슨 하우스'가 그녀의 세계였다.
앤드류 와이어스의 그림이 호평을 받고 갤러리에 걸렸지만 크리스티나는 올슨 하우스를 떠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허름한 집은 크리스티나를 옭아맨다. 결국 그곳은 그녀 생의 무덤이기도 했다.
누구든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 가야 할 곳이 분명 눈앞에 보이지만 갈 수 없는 상태, 가야 하지만.... 아득하게 먼 것처럼 여겨진다.
비가 몹시 내리던 밤이었다. 우산 없이 나온 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아파트 불빛을 세어보던 날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 통을 들고 내리는 비를 흠뻑 맞고 있는 나는 다시 그곳. 나의 세계, 나의 모든 것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비가 머리를 적시고 볼을 타고 내려서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처럼 맛보는 자유와 해방감이었다.
안락한 불빛이 비치는 그곳은 비가 내리는 이곳과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얼마를 그리하고 있었을까. 폭우 탓인지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 커다랗고 새하얀 개를 보았다. 아파트에 저렇게 커다란 개를 키울 리 없는데... 처음 보는 개였다. 개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음식물 쓰레기 통 때문일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다음 동작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사이 다가오던 하얀 개는 할끗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방향을 바꾸었다.
개의 털도 완전히 젖어있었다. 개는 걷다가 다시 뒤돌아 보았다. 마치 따라오라는 것처럼 여러 차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있는 사이 개는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묻혀버렸다.
개를 따라가지 않은 나는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의 세계로 돌아갔다.
나오기 전과 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나의 세계였다. 내가 그곳에 있든, 그곳에 없든 너무도 질서 정연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는 견고한 세계.
가끔 그 개를 생각한다. 정말 그 개를 본 것은 사실일까? 내가 상상 속의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만일 그 밤, 그 개를 따라갔다면 지금 나는 어느 생의 갈목에 서있을까... 곰곰 생각해보곤 한다.
누구나 '크리스타의 세계'가 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세계다.
폭우 속에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익숙한 공간을 타인의 집처럼 바라보았다.
아마도 희망이 느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 속 나는 삶의 부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 비 속에서 무엇을 바랐을까.
크리스티나가 두발 두 손으로 땅을 딛고 기어 '크리스티나의 세계'로 회귀하듯... 결국 나는 나의 세계로 회귀하였다. 벗어던질 수 없는 그 세계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희망을 만들면 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