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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바라보기

얼굴들은 서로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 James Ensor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jpg


수많은 가면 사이에 가면을 쓰지 않은 앤소르가 있다. 가면들은 엔소르의 어제, 혹은 언젠가 지난날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흔히 '페르소나'를 외적 인격 혹은 가면을 쓴 인격이라 부른다. 법률용어로써 페르소나는 ‘사람은 누구나 얼굴이 있다’는 평등의 가치와 ‘모든 얼굴은 서로 다르다’는 개별성의 가치를 결합하고자 하는 인류의 염원이 담긴 말이었다.

외적 인격, 가면을 쓴 인격...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의 엔소르는 살짝 비켜선 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가면들은 대부분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슬픔과 환희와 고통과 억눌림과 어색한 미소와 찡그림과 무표정이 박제된 엔소르의 페르소나들이다. 생각해보면 엔소르만의 얼굴은 아니다.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내 얼굴 어딘가에도 섬뜩함, 분노, 흉측함, 비굴한 웃음, 어색한 미소, 무표정, 허탈, 심란함, 허무가 존재한다.

경극배우처럼 수많은 얼굴 가면을 이미 얼굴 안에 가지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벗어던지는 것이 아닐까.

얼굴들 사이에서 진짜 얼굴은 낯설다. 무엇을 보기 위함인지, 어디로 향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다.

같음과 다름이 공존하는 사람의 얼굴.... 얼굴은 '얼(영혼)의 굴(통로) 즉 영혼이 통과하는 길이라는데 제각각 어딘가를 향하는 얼굴들 사이에서 본래의 얼굴이라고 여겨지는 얼굴은 외로워 보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얼굴(vultus)들은 서로가 다른 이들을 향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보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 보기를 통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숙소에 짐을 풀고 아무 목적 없이 낯선 거리를 걸어본다. 낯선 도시,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지하철 개찰구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쏟아져 나간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은 저마다 하나의 풍경이다. 여행지에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 어떤 풍경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때도 있다. 희로애락의 언어가 새겨진 얼굴에서 그들의 삶을 유추한다.


오래전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지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찍는 사진작가를 만난 적이 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그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인화된 사진에서 읽어 내고자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타인들의 표정에서 포착된 감출 수 없는 날 것의 기록 들일 것이다.

일상은 무미하고 덧없다. 문득 퍼즐 맞추기를 생각한다. 퍼즐이란 완성되었을 때만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지 완성되기 전은 낱낱의 조각들에 불과하다. 무언가를 맞추기 위해 조각과 조각들을 연결해본다. 이어지지 않는 난해한 조각들. 어린 시절부터 퍼즐 맞추기를 시작하는 것은 아마도 난해하고 복잡한 삶에 대한 예행연습이 아닐까. 아마도 그는 늘 같은 거리에서 사람들의 거대한 퍼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개별적인 사람들이 하나의 조그만 퍼즐 조각이 되어 그의 카메라 앵글에 포착되는 것.


여행지에서의 아침을 낯선 이의 얼굴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일, 한가로이 도시 여기저기를 거닐다 저녁 무렵 또다시 낯선 이의 얼굴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일. 그 도시의 랜드마크를 쫒았다니는 것보다 그곳 사람들의 얼굴을 읽는 것만큼 의미 있는 여행은 없을 것이다. 출, 퇴근길 사람들의 표정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도 생생하고 극적이며 거룩한 것이다. 에마누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사람의 얼굴은 서로 다른 이를 향한다. 내 얼굴의 존재 의미는 다른 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다른 누군가의 얼굴도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본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연출돠지 않은 날 것의 얼굴로 다른 이를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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