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가식을 벗어던지고 추는 춤은 몸의 언어
인간은 춤추는 존재다. 유희의 인간
"우리가 춤을 출 때, 그것은 기도의 일부다. 춤을 추고 있지만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기도의 일부다. 영혼, 육체, 마음이 늘 한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다." - 푸에블로족
앙리 마티스의 작품세계는 강렬하고 거침이 없어 마치 인간을 뛰어넘는 야수와 같다고 해석되어 '야수파'라 불린다.
앙리 마티스의 댄스는 현재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박물관에 소장된 댄스 2가 남아있다. 댄스 1을 그린 뒤 러시아 명화 수집가인 세르게이 슈킨(Serguei Chtchoukine)의 의뢰로 그린 그림이 댄스 2다. 댄스 1과 2가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른데 댄스 2에서 역동적인 느낌이 훨씬 강하다.
댄스 1
댄스 2
“춤”은 원근법을 무시하여 다섯 명의 나체들을 모두 같은 크기로 그린 작품인데 화폭이 무려 4미터에 달하는 대작이라 한다. 공간을 인지할 수 있는 그 어떤 단서도 없는 곳, 오직 초록을 딛고 하늘을 배경 삼아 춤에 몰입해있다. 낭떠러지에서 추는 춤. 춤을 추다 초록의 끝에 이른 그들은 어느 순간 하늘로 날아오를 것 만 같다.
빨강, 파랑, 초록의 단순한 구성은 서로 강한 대비를 이루어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파란 하늘, 초록 들판, 벌거벗은 빨간 몸의 남녀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들의 몸은 오직 춤으로써만 말하고 있다.
눈을 감고 고개 숙인 그들의 가슴과 배, 팔, 다리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분명 한 시점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린 작품임에도 우리는 여전히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에게 배경 음악이 있다면 아마도 강렬한 북소리가 아닐까.
벌거벗은 인간의 육체는 정직하다. 춤을 추는 동안 그들에겐 춤이 언어가 된다. 손을 잡고 춤을 추는 5명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춤에 빠져 있다. 5명의 사람들 중 4명은 손을 단단히 붙잡고 있느냐 그림 전면 뒷모습으로 보이는 사람과 왼쪽 측면의 사람은 팔을 놓친 것처럼 그려져 있다. 놓쳐버린 손, 잡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한 마티스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사마 춤을 추고 싶은 날이 있다
레코드 가게나 비디오 대여점이 인기였던 때가 있었다. 퇴근길 레코드 가게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이국의 음악 소리에 끌려 음반을 사고 내친김에 터키 영화를 빌려왔다. 지금은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 터키 영화.
검은 모자를 쓰고 터키 전통 복장을 한 남자 무용수가 한 손은 하늘을 향해 쳐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빙빙 돌던 장면만 기억에 남아있다. 남자가 원운동을 하며 돌 때마다 그의 치마 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 남자 무용수의 얼굴은 고뇌로부터 벗어난 물아의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 남자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는 것일까?
터키 사람들은 사마 춤(Sama Dance)의 세계가 곧 그들 정신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사마 춤은 단소와 북장단에 맞춰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다른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회전하면서 원운동을 하는 매우 단순한 춤으로 자전인 동시에 공전인 2중, 3중의 끊임없는 원무다. 단순해 보이는 동작을 세 시간 이상 반복하면서 몰아의 경지에 이르고, 이를 통해 알라에게 자신을 일치시켜 간다. '알라'라는 최고의 가치가 원운동의 반복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형식을 통해 추구된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이다. 자신이 원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더 큰 원의 호를 긋고 있는 통합과 조화,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확장시켜간다.
사마 춤을 추던 터키 무용수의 경건한 표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삶의 언저리를 종종거리며 나도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 그러나 숭고하다거나 경건한 몸짓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강력한 원심력을 핑계 삼아 삶의 궤도에서 퉁겨 나가고 싶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제목조차 알 수 없던 터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여전히 날마다 사마 춤을 추고 있다.
내 원의 반경은 얼마나 더 넓어졌을까? 20대의 정점에 있던 그때와 지금의 나 사이. 수많은 시간들이 원 속으로 들어와 자리 잡았다. 내가 만들어내는 삶의 궤적. 나는 그 안에서 사마 춤을 추는 중이다.
춤은 좋아서도 추고 괴로워서도 춘다. 언어로 말하기 어려운 사람을은 몸으로 말한다. 춤추는 이의 언어는 바로 춤이다. 독무도 있고 군무도 있고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추는 춤도 있다. 춤이 하나의 의식이면서 유희이고 언어였던 시대가 있었다. 여전히 지금도 사람들은 춤을 춘다. 단순히 빙빙 도는 춤이든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춤이든 누구나 춤을 춘다. 춤을 추는 행위는 영혼과 육체와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춤은 때로 삶의 척박함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하루라는 시간, 일상의 반복 그날이 그날 같다. 어제와는 다른 날임을 입증하는 달력의 분명한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비로소 달력을 보며 하루의 걸음을 알아차린다. 사마 춤을 추고 있다. 한 손은 닿을 수 없는 허공(하늘)을 향해 또 다른 한 손은 대지... 이상을 향해 한 손을 뻗고 또 한 손은 현실을 향한다. 이상과 현실, 하늘과 땅 사이 날마다 빙빙 돈다. 저마다의 원을 넓혀가는 일. 원과 원은 중첩되다가 부서지고 흩어진다. 서로와 서로의 원이 만난다. 손과 손을 마주 잡는다.
일체의 것들. 나를 포장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몸으로 빙빙 돈다.
저마다의 사마 춤이 모여 군무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하나의 원이 되고 그 원은 커지고 더 커져서 거대한 원이 된다. 낱낱의 사람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원만 남는다.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날마다 돌고 있다. 자전과 공전을 품고 추는 춤의 끝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춤이란 본디 끝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