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존 버거
“ 세상의 어떤 남자도 당신 같지는 않아요. 모든 것들이 같은 것에서 만들어지지만 사람들은 모두 서로 다르게 만들어지니까요...(중략)... 남자는 막 결정을 내리려는 참이었어요. 그런 순간 많은 남자들은 그렇게 특별한 표정을 짓곤 하잖아요. 마치 사라지고 싶다는 듯한, 하늘 속으로 그대로 녹아들어 버리고 싶다는 듯한 표정, 작은 순교 같은... 하지만 여자들은 달라요. 여자들은 대부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단단히 앉아서 결정을 내리죠. 나도 방금 한 가지 결정을 내렸어요. 우리 결혼하는 게 어때요? 당신이 청혼하고 내가 ‘네’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그런 다음 그들에게 부탁해봐요. 그들이 허락하면 내가 당신을 찾아가 결혼식을 올리고 그럼 앞으로 영원히, 매주 한 번씩 면회실에서 만날 수 있어요.!”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 당신의 아이다-
“ 덧없는 것은 영원한 것의 반대말이 아니에요. 영원한 것의 반대말은 잊히는 것이죠. 잊히는 것과 영원한 것이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들은 틀렸어요. 영원한 것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옳아요. 영원한 것은 독방에 갇힌 당신과 여기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당신에게 파스타치오와 초콜릿을 보내는 나를 필요로 하죠 ”
- 당신의 아이다 -
불의를 합법화하는 악법들이 있다. 그런 법은 어설프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법들이 적용되면 그 법들이 강요하려는 바로 그것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법들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무시하고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물론 동지여, 그런 법률에 대한 우리의 저항은 어설프다.
- 사비에르의 메모 -
존 버거의 <A가 X에게>는 사비에르에게 아이다가 전하는 편지와 편지 뒷면 사비에르의 메모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커상 2008년 수상 후보작에 오른 작품으로 서두에서 존 버거 자신이 직접 등장해 이 편지와 메모들을 어느 폐쇄된 교도소에서 발견했음을 밝히고 있어, 기존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약제사인 아이다는 반정부 테러조직 결성 혐의로 이중 종신형을 선고받고 독방에 수감된 연인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중 종신형이란 살아서는 감옥을 나올 수 없으니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아이다는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보고 듣고 기록하고 사비에르는 감옥 안에서 듣는 바깥의 소식 또는 기억을 통해 세계의 불평등과 세계화, 자본주의, 제국주의가 지닌 폭력성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한다. 서로의 부재를 견디는 힘, 사랑을 확인하는 절제된 몸짓의 기록이다.
“ 희망과 기대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요. 처음에는 지속되는 시간의 차이로만 생각을 했어요. 희망이 좀 더 멀리 있는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말이에요.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대는 몸이 하는 거고 희망은 영혼이 하는 거였어요. 그 둘은 서로 교류하고 서로를 자극하고 달래주지만 각자 꾸는 꿈은 달라요. 몸이 하는 기대도 그 어떤 희망만큼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나의 기대처럼요. 그들이 당신에게 이중 종신형을 선고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들의 시간은 믿지 않게 되었어요.”
- 당신의 아이다-
희망과 기대, 기대는 몸의 갈망이고 희망은 영혼의 갈망이라는 아이다의 말,
결국 희망과 기대는 ‘갈망’이라는 점에서 같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비에르를 향한 아이다의 갈망은 희망이면서 기대이다. ‘그들의 시간을 믿지 않는’ 아이다....
기대와 희망은 현실 세계의 시간과는 무관한 개념이다.
“ 적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다. 정면에서 마주한 적은 절대 무너뜨릴 수 없다. 정면에서 마주한 적은 승자로 보인다. 계속 승자로서 보이기 위해 적은 새로운 정면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상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적은 그 상대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수많은 측면 공격을 위한 기회로 활용한다. 이것이 저항의 전략이다
- 사비에르의 메모-
“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당신 오른손 속 목에 있는 흉터를 떠올렸어요. 화상 흉터, 내가 당신을 알아보는 첫 번째 표시예요. 눈을 수식하는 공식적 형용사는 갈색, 파란색, 옅은 갈색, 녹색, 당신의 눈 색깔은 사비에르 색이에요....(중략) 나의 모든 잘못과 결점 중 당신은 어떤 게 가장 마음에 들어요? ”
사비에르의 눈 색깔을 사비에르 색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다의 눈 색깔은 아이다의 색일 것이다. 보지 못하는 연인의 화상 입은 손목 흉터를 떠올린다.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어떤 것들.. 흉터든, 눈 색깔이든, 목소리든... 아이다는 자신의 장점과 잘한 것을 사비에르에게 묻지 않고 잘못과 결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묻고 있다.. 삶에서 흉터와 같은 것들은 오히려 연민처럼 오래도록 가슴에 새겨지는 법이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죠 ( p 93)
" 그들이 당신을 잡아가기 전에는 미래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았어요. 부모님 세대는 우리가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하셨죠.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남기 위해 싸우는 거예요.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다음부터 미래는 항상 나와 함께 있어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삶을 생각하는 것은 머리인지 아니면 자궁인지 아니면 가슴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당신 아이를 가지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감방의 콘크리트 바닥과 낡은 철문 사이로 내가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내 속옷 안에서 훗날 시간을 폭발시킬 힘이 맨 처음 자리를 잡게 될 거예요. “
-당신의 아이다-
“ 어떤 역사도 침묵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역사를 아무리 많이 점유하고 깨부수고 그에 대해 거짓말을 하더라도 인간의 역사는 입을 다물기를 거부한다. 무관심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 속에 계속해서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다.
- 사비에르 -
약국 문을 열기 전부터 사과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일주일 전 마을을 아수라 장으로 만들었던 미사일을 떠올렸죠. 이발사 가산의 집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어요.
새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나타냈어요. 기도처럼 나뭇가지에 나타냈어요. 가산의 집을 조준 사격했던 날 사과나무에 자리 잡은 새들이 대답처럼 여겨졌어요. 그 새들을 바라보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
아파치가 우리를 겁주고 우리를 관찰하기 위채 낮게 날았어요. 헬기의 양 날개에
붙어있는 두 개의 헬파이어 미사일이 보였고 우리를 겨냥하는 기관총이 보였어요.
... 중략... 거대한 탱크가 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어요. 소리가 주는 두려움 야말로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죠. 탱크가 우리 주변을 빙빙 돌았어요. 첫 번째 탱크의 승강구에서 지휘관이 나와 이제 강제 해산시킨다고 했어요. 탱크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좁혀왔어요
탱크가 한 반퀴돌자 그물을 친 구멍 사이로 헬멧과 눈, 장갑을 낀 손들이 보였어요.
우리는 노래를 시작했어요.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나이 든 여인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어요. 우리는 늙지 않았어요. 그저 나이가 들었을 뿐이에요. 천살쯤 되었을 거예요...
다음 탱크가 다가오며 우리가 입고 있던 치마가 바람에 출렁거렸어요. 우리는 두려웠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할머니들의 쉰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기 위해 왔다! 우리의 무기라곤 이제 쓸모없게 되어버린 자궁밖에 없었죠... 그랬어요.. 그때 갑자기 탱크 한 대가 멈추더니 공터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어요. 나머지 석대도 그 뒤를 따랐어요. 우리는 여전히 손을 꼭 잡고 있었지만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우리가 살아온 세월에 걸맞게 아주 천천히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공장 주위를 맴돌았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는 당신의 것이에요. “
- 당신의 아이다-
아파치와 탱크가 저항하는 삼백 명의 여인들을 포위한다. 포위망은 좁혀지고 탄알이 장착된 포신을 마주하는 눈은 두렵다. 그러나 천살쯤 먹은 여인들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가진 거라곤 이젠 아무 쓸모없는 자궁. 자궁이 무기인 여인들... 죽음 앞에서 저항의 방법은 손을 잡고 쉰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 탱크와 아파치가 기적적으로 물러갔다... 아무 쓸모없는 자궁이 승리했다... 눈앞에 그려지는 절박함... 누군가가 저항에 합류하러 오던 길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아이다의 편지에 드러난 저항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누구에 대한 저항인지 알 수 없으나 불의에 대한 저항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샤워하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모든 고통은 어느 시점에는 ‘아니요’라는 단어로 흘러갔다가 다시 계속돼요. 마찬가지로 모든 즐거움은 “네”라는 단어로 흘러갔다가 계속되죠.
당신에게 나는 ‘네’라고 말해요. 우리가 살아야만 하는 삶에 대해 나는 ‘아니요’라고 말하죠. 하지만 나는 그 삶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우리가 자랑스러워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제삼자가 돼요. 나도 당신도 아닌, 그리고 당신도 똑같이 제삼자가 되죠. 그 어떤 ‘네’나 ‘ 아니요’를 넘어선 것에서 말이에요
오늘은 내 생일이라서 온종일 ‘네’만 반복했어요. 나는 서있고 머리를 풀고 ‘네’라고 말해요.... (중략)... 눈을 감고 감옥을 생각해보라고. 감방 안에서 서성거리고 앉고 가만히 서 있고 웅크리고 잠이 드는 게 어땠는지 기억해 보라고... 감옥에선 몸도 압수를 당해요. 몸이 잃어버린 영역은 이미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천천히 다시 되찾아아 와야 해요. 한 지역씩.
.... (중략) 네, 태양이 뜨고 이제 바람이 일어요. 그렇게 우리 셋이 되었네요. 건너편 유칼립투스가 춤을 추는 것 같아요. 나뭇잎들은 모두 모든 여성들 중 가장 여성적인 모습으로 우아하게 흔들려요. 우쿨렐레, 유칼립투스 너무 우울해요. 내 생일이
... 침묵엔 줄무늬가 있어요. 그 부드러움은 끝없는 침 입고 충돌의 결과로 생겨난 것... 당신을 만져보기 위해 잠깐 준비해요. 그런 다음 우리 함께 잠들어요. 잠은 최초의 집이에요. 지붕도 없고 벽이나 침대도 없는 집. 제 생일 다음 날, 당신을 그 맨 처음 집으로, 내 사랑, 안내할게요. 괴물 같은 문 밑으로 그 잠을 밀어 넣을게요. 그 안에 내가 있을 거예요... "
-당신의 아이다 -
생일상을 준비하는 아이다. 가장 함께하고 싶은 이는 연인 사비에르이지만 그는 올 수 없다.
창문 밖으로 유칼립 투수 나무만이 우아하게 춤을 춘다. 수없이 ‘네’ ‘네’ ‘네’를 외친다.
‘아니요’를 외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생일날... 파티는 끝나고 침묵의 줄무늬만 남았다.
사비에르를 그날 밤 잠에 초대하겠다고 한다. 잠은 최초의 집이라고... 함께 할 수 있는 최초의 집. 지붕도 담도 창문도 없는... 그러나 그 집으로 맨 처음 당신을 초대하겠다는 아이다.
아이다는 사비에르를 나의 엎드린 사자, 미 구아포, 카나 님 나의 날개, 미 소플레 테,
야 누르,... 수많은 호칭으로 부른다. 아이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편지.
사비에르의 답장은 없다. 편지 뒤에 짤막한 정치적 메모가 사비에르의 기록이다... 아이다는 끊임없이 사비에르의 안부를 묻는다. 희망에 대해, 기다림에 대해... 저항에 대해... 침묵에 대해... 만나게 될 언젠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시대적 배경도 공간도 드러나 있지 않은 소설에서 , 어떤 에로틱한 사랑의 장면도 묘사되어있지 않은 소설에서 저항, 사랑, 승리, 희망을 읽을 수 있다.
A가 X에게.... A는 알파벳의 처음 글자... X는 알파벳의 맨 끝 글자이다... 처음과 끝.. 처음은 끝이고 끝은 처음이다.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있다, 중간에 어떤 혼돈과 절망과 좌절이 숨어 있을지라도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이면서 끝이고 끝이면서 처음이다.
열화당에서 출간된 <A가 X에게>의 앞표지 그림은 파이윰의 여자 초상(161~192년경), 뒤표지 그림은 파이윰의 남자 초상(아부지르 엘 멜렉 출토 1세기)으로 되어있다.
파이윰 초상화(Fayum mummy portraits). 는 콥트기 이집트, 무려 2천 년 전, 신약성서가 쓰인 시기의 초상화다. 대부분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의미로 그려졌다고 한다.
파이윰에서는 로마 지배기 제작된 미라 초상화가 다수 출토되었는데 이집트인은 매장 시 미라의 안면을 천으로 쌀 때 사자의 생전 두상을 주로 납 화법으로 그린 초상화를 위치시켰다.
한 여인의 파이윰 초상화와 한 남자의 파이윰 초상화..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눈동자가 살아있다. 고대인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지금 현대인의 얼굴을 그린 것처럼 생생하고 또렷하다.
파이윰의 유적으로 발굴된 미라의 초상화. 아이다와 사비에르의 사랑 또한 그러할 것이다. 종신형을 선고받는 사비에르와 결혼을 꿈꾸는 아이다...
매일 밤 당신을 조각조각 맞춰 봅니다. 아주 작은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 당신의 아이다-
매일 밤 누군가의 뼈 마디 하나하나... 뼈 조각 하나하나를 맞춰보고... 잠이라는 최초의 집으로 초대할 누군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수많은 ‘네’와 수많은 ‘아니요’를 반복하지만 그래도 삶은 수많은 ‘네’의 연속이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 려원
존 버거는 절묘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부드러움과 정치적 비판을 향한 희구를 도구삼아 다듬어낸 절제된 분노에 관한 작품이다. 그가 쓰는 것은 모두 심오하고 정확하며 대답을 요구한다. 그것은 자유와 그 결핍, 희망과 그 결핍, 권력과 그 결핍, 사랑과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하는 끔찍한 갈망이다. / 아룬다티 로이이 말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