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몇 주가 지나서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파란 소인이 찍힌 편지의 겉봉은 발신지가 파리 우체국임을 알려주었지. 편지를 손에 들자 묵직하게 느껴졌다. 편지 겉봉의 깔끔하고도 또렷한 아름다운 필체가 눈에 띄었다. 편지글도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그와 똑같은 필체로 적혀있었다. 그때부터 나와 릴케 사이에 편지들이 규칙적으로 오갔다.... 중략.... 10통의 편지들은 오늘과 내일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1929. 6월 베를린에서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


첫 번째 편지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중략.... 당신의 일상이 너무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당신의 일상을 탓하지는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스스로를 질책하십시오. 댱신의 일상의 풍요로움을 말로써 불러낼 만큼 아직 당신이 충분한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십시오..

친애하는 카푸스 씨.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충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당신 삶의 샘물이 솟아나는 그 깊은 곳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보상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자꾸만 바깥 세계만을 쳐다보고 당신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은밀한 감정을 통해서나 답해질 수 있는 성질의 질문들에 대해 외부로부터 답을 얻으려 할 때처럼 당신의 발전에 심각한 해가 되는 것도 없습니다.

1903년 2월 17일 파리. 당신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으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 번째 편지

당신 인생이 어떠한 항로를 간다고 해도 확신컨대 그 책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경험들과 실망들과 기쁨들의 모든 실타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실타래가 되어 당신의 성장의 직물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게 될 것입니다

1903년 4월 5일 이탈리아 피사 근교의 비아레지오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세 번째 편지


여기서는 시간을 헤아리는 일이 통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1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10년도.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옵니다.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있게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게 고맙기만 한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내가 모든 것이라고.

190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라이너 마리아 릴케


네 번째 편지


당신은 참으로 젊습니다. 당신은 모든 시작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 가슴 안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당신 내면의 욕구에서 솟아 나오는 그 어떤 것도 미워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당신 성장의 뒤쪽에 처져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살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들은 당신을 동행할 각오가 되어있고 나의 신뢰는 당신과 함께합니다


1903년 7월 16일 브레멘 근교 보르프스베데에서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여섯 번째 편지


모든 것을 자기 안에 품으려면 신은 마지막에 오는 존재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토록 바라는 존재가 이미 과거에 존재했다면 우리의 존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꿀벌들이 꿀을 모으듯 우리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을 모아서 신을 짓습니다. 또한 심지어 하찮은 것으로부터,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우리는 신을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카푸스 씨 시작하기 위해서는 신은 당신에게서 바로 그러한 삶의 불안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즐겁게 보내십시오. 딩신 가슴속의 모든 것들이 신을 짓는 작업을 하고 있는 순간인지도 모릅니다.


1903년 12월 23일 로마에서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일곱 번째 편지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쉬운 쪽으로만 해결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운 것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어려운 것을 향합니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자라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또 안으로부터 제 특징을 만들어내며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떤 저항이 오더라고 그 고유성을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쪽을 향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와 같은 확실성 많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배우는 기간은 언제나 기나긴 밀폐의 시간입니다....

1904년 5월 14일 로마에서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여덟 번째 편지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관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부터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그것을 그냥 일어나는 대로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너무 쉽사리 질책의 눈길로 되돌이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당신의 과거는 지금 당신이 마주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나름의 몫을 갖고 있습니다.... 인생은 힘들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또한 그 인생은 성장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려움과 슬픔을 지니고 있으며 당신이 인생보다 훨씬 뒤처져 있습니다....

1904년 8월 12일 스웨덴의 보르 데뷔 고르드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아홉 번째 편지

마음속에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십시오. 또한 소박한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어려운 것을 더욱더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고는 삶이 당신에게 벌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당신의 가장 훌륭한 시간에 할 수 있었던 것 보디 훨씬 더 많은 것을 당신으로부터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1904년 11월 4일 스웨덴의 푸루 보리

당신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열 번째 편지

당신께 바랄 것이 있다면 큰 믿음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그 웅장한 고독이 당신에게 작용하도록 내버려도라는 것뿐입니다.... 그 고독은 앞으로 당신이 체험하고 행할 모든 것드 속에 익명의 영향력이 되어 계속해서 그리고 묵묵히 결정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당신이 거친 현실의 어딘가에서 고독하고도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1908년 성탄절 다음 날에 파리에서

당신의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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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우편이 아닌 손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 예쁜 편지지를 사 와서 글자가 틀리지 않게 정성을 다해 쓰던 편지들... 그림도 그려 넣고... 말린 나믓잎도 끼워 보내던 그 시절의 기억들... 빨간 우체통으로 달려가 편지를 집어넣으면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우체통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가죽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편지를 전해주던 기억...

대문 앞의 우편함에는 아버지에게 온 우편물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은 내게 온 것들이었다....

학창 시절 편지를 썼던 일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포항으로 갔던 한 친구가... 태종대 앞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다는 글을 보내왔을 때 나는 언젠가 반드시 태종대에 가서 그 친구가 말한 파도를 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정말 태종대에 갔을 때 그 친구와는 이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지만 그 친구 생각이 났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갔던 한 친구는.... 운동권 선배와의 사랑에 빠져있다는 소식과... 곧바로... 너무도 빠른 결혼사진을 보내욌다. 편지 속 동봉된 사진 한 장.. 한복을 입고 볼연지를 한 친구의 모습은 낯설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있었다. 그때 우리는 기껏 대학 초년생이었는데... 나는 가끔 그 친구의 사진을 떠올려보곤 한다.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그 사진... 그러나 기억 속에는 또렷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명문대를 나오고서도 취업을 위해 다시 방통대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지도 꽤 오래다...


또 어떤 날은 우편함으로 이상한 편지가 섞여 들어오곤 했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편지.

나는 그 편지를 일본 소설의 주인공 '요오조우'의 편지라고 불렀다.

요오조우와의 편지가 중단된 것은 그가 편지 속에 자신의 사진을 동봉하면서부터였다. 사진 속 요오조우는 요새 기준으로 보면 깔끔하고 도회적인 얼굴이었다.

그러나 왜 그때 나는 사진 속 요오조우를 본 순간 편지 쓰는 일을 중단해버리고 싶었을까.

그가 편지에 쓴 낭만적이고 수사적이고 문학적인 표현들이... 어딘지 모르게 진실되지 않다는 판단을 한 것은 너무도... 가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속 표정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편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사진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편지들.... 괴로워서도 쓰고, 생각나서도 쓰고, 보고 싶어서도 쓴다.... 편지에 담은 수많은 나의 시간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편지에 담긴 누군가의 시간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젊은 시인 지망생 프란트 크사버 카푸스에게 보낸 릴케의 편지. 1903년 무렵의 편지들...

그가 말한 고독에 대한 것들. 사랑에 대한 것들, 삶에 대한 것들이 무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릴케는 프란츠 크사버 카푸스에게 인내하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삶은 언제나 옳다"고....

"삶은 언제나 옳다"는 말에 밑줄을 그은 흔적이 있다...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릴케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오래전 내가 그은 밑줄의 진의를 알 수 없다.

릴케 자신의 삶은 언제나 옳았을까? 릴케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아마도 나는 그것을 물어볼 것 같다.

릴케는 고통 속에서 모든 것을 배워가고 있다고 말한다. 인내가 답이며 고통이 성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자신을 지나치게 관찰하지 말라고... 지나치게 관찰하고 지나치게 평가하다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릴케는 젊은 시인 지망가에게 인생의 조언을 써서 보냈지만 그의 편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들이다.

장미의 시인 릴케는 세상에 없지만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릴케를 만날 수 있다. "삶은 언제나 옳다"는 릴케의 말을 확인하는 가을이기를 바라며...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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