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의 시가 생각나는 대선
저마다의 분노를 투표용지에 그리면 된다...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김수영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반추되는 시기다.
컴퓨터를 켜면 가장 중요한 이슈들.. 3월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처럼 마음이 아프고 시려본 적이 있을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기가 두려워 본 적이 있을까
무슨 게이트가 그리도 많으며 게이트의 주인들은 저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한다.
저마다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구원할 최적의 최고의 후보라고 한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유권자들도 그리 생각할까? 분명 아닐 것이다.
세상에 허물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만일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정말 그러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신에게까지 진실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기만에 빠진 자...
그런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유권자인 나도 그들을 비난할만큼 나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인가? 나 또한 김수영의 시에 나오는 사람이다.
제대로 분노할 것에 분노하지 못하면서
아주 작은 것들에만 현미경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는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옆으로 비켜서서 비겁하고 궁색한 분노를 일삼는 나는
시인 김수영처럼 모래에게 바람에게 먼지에게 풀에게 나는 얼마큼 작고
얼마나 못났으며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이중적인 인물인가를 물어야 한다
기사를 검색하기가 두려운 날들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왕궁에 가고자 하는 자들의 음탕함에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면서
김밥 값이 올랐다고 분노하고 라면값이 올랐다고 커피값이 올랐다고 분노하고... 기름값이 올랐다고 분노하고 있다. 우리는 왜 사소한 일에는 과장해서 분노하면서
더 치밀하고 교묘하고 은밀하고 거대한 범죄에는 면죄부를 주려 할까. 외면하는 우리들의 양심은.....
분노를 하되 분노의 폭과 깊이가 분노하려는 주체와 대상에 맞게 분노해야 한다는 말이다.
비켜서서 적당히 하는 분노가...
우리들의 비뚤어진 분노가...
비겁한 분노가 방향성을 제대로 갖지 못하면
왕궁에 들어가려는 자의 음탕함을 외면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들의 분노는 더 이상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
비켜서지 않고 비겁해지지 않으려면
투표용지에 저마다의 분노를 그리고 오면 된다.
역사 앞에서 우리들의 분노는 얼마나 모래알처럼 작은 것인가.
그러나 그 작은 종이 한 장 위의 분노가.... 모래알보다 더 작은 분노가 뭉치고 뭉치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평소에는 아무리 아무리 비겁하고 비켜서더라도
적어도 그날만큼은 비겁하지 말기를...... 3. 9일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비겁하지 말기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 려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