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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심심함의 회복. 피로사회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스스로 만져질 수 있는 '피로'의 복원

피로사회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               


한 병철의 <피로사회>를 다시 꺼내 읽는다.

모든 읽는 행위는 모든 쓰기 행위의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 규정할 수 있다. 우울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의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다. 타자의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따라서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     

    

한 병철은 ~해야 한다. ~ 해서는 안된다로 규정되던 ‘규율 사회’와 ‘할 수 있다’로 규정되는 성과사회를 비교한다. ‘yes we can’으로 모든 것이 다 가능하리라는 성과사회의 신기루.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과잉은 우울과 낙오를 양산한다고 이야기한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을 대체된다. 능력의 긍정성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p26~28

알랭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 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알랭 에랭배르의 견해에 따르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명령이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우울을 양산한다고 하였는데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하고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과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긍정성의 과잉상태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animal laborans)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우울증은 성과 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열망, 자신과의 끝없는 전쟁이 우울을 양산하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된다는 견해.... 성과 사회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사회가 규정한 패러다임은 스스로를 스스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자기답게 살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 스스로에게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멀리 태스킹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멀티태스킹은 인간만이 능력이 아니라 수렵 자유구역의 동물들에서도 보이는 특성 중 하나다. 생존을 위한 필수 기법인 셈이다. 오롯이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는 현실. 무언가를 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 문명의 진보라기보다는 문명의 퇴화에 가까운 모습일 수도 있다.     

과잉 주의 Hyperattention에 빠진 사람들은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한 ‘깊은 심심함’을 망각한 지 오래다. 심심한 것을 견딜 수 없는 현대인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정보를 쫓아 재빠르게 갈아타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인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말하며 잠이 육체의 이완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의 이완이라고 설명한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을 낳지 못하고 단지  기존의 것을 재생 가속화할 뿐이며, 오늘날과 같은 과잉 주의 사회에서는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 자고 있다고 한탄한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라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 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깊은 심심함'은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는 그와 동시에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단순 반복적인 일상은 새로운 것은 낳지 못한다. 늘 같은 일상 속에 늘 같은 사고를 하고 늘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의 일거 일투족을 감시하여 replay 버튼을 누르면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아무 목적 없이 혹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그 목적이 일상 속에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 체 시시포스처럼 삶, 돌을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화 속 시시포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깊은 심심함’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깊은 심심함을 마음으로부터 배제한 지 오래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며, 아예 귀를 닫아버린 우리들....    


벌거벗은 노동과 벌거벗은 생명..

스스로에게 호모 사케르가 되는 것     


p41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게 하고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세상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으므로 존재의 결핍 앞에서 불안과 초조가 생겨난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  Entnarrativisierung)  되었으며 이로 인해 허무의 감정은 더 강화된다.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노동 자체가 적나라한 활동이다, 벌거벗은 노동은 벌거벗은 생명에 조응하는 활동이다. 벌거벗은 노동과 벌거벗은 생명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된다.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이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간신히 생명을 연명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호모 사케르다.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후기 근대의 성과 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호모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다.

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적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삶의 가속화는 존재의 결핍을 부추기고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새로운 강제를 계속 만들어낸다. 강제 사회에서는 모두가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며 그 노동수용소의 특징은 한 사람이 동시에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자 가해자라는 점이다. 그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호모사케르는 추방당한 자라는 뜻이다. 과잉 활동과 긍정 이데올로기 속에서 존재의 결핍, 허무,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 규율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강제와 부정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있어 포로이자 감독관이며 희생자이며 가해자다. 무엇으로부터 추방당한 것일까?

우리는 스스로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라는 생각을 한다. 날마다 우리가 조금씩 잃어가는 것들. 망각하는 것들.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는 것들. 익숙함의 타성과 비겁한 타협들. 바쁨을 빙자한 자기 방치, 약한 것들에 대한 방관, 무관심, 자기기만, 가식과 편견, 편 가르기.. 세상 속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돌이켜 생각하는 힘 Nachdenken을 가지려면 우리는 잠깐 멈추어야 한다.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Fortdenken) 만을 반복하는 삶은 추방당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스스로 만져질 수 있는 피로’ 그런 피로는 치유적 피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 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피로’에 대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만 한병철은 피로의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한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보는 것이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성과 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우리’의 피로가 아닌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분열의 피로다. 이때의 피로는 공동체의 친밀함과 언어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이다. 한트케는 보지 못하고 분열시키는 피로와 대조적으로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 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 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우리는 보고 또 보인다. 우리는 만지고 또 만져진다. ‘접근을 허락하는 피로, 만져지고 스스로 만져질 수 있는 피로’ 그런 피로는 치유적 피로다.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을 빌자면 너를 향해 지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앉아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 p66~ 71 일부 발췌)     


‘피로사회’라는 용어를 처음 듣는 순간. 현대인의 자기 착취적 삶에 대한 이야기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병철이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앉아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피로의 구름이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라는 피터 한트케의 말에 드러난다.

날뛰는 말 위에 올라타서 질주하는 우리들은 현실이, 삶이 우리를 피로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날뛰는 말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날뛰는 말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의지가 자신에게 있지만 말에서 내려오는 순간 우리는 낙오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앞만 바라보고 질주하면서 우리는 늘 ‘피로’하다고 이야기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어지는 피로 속에 그 피로가 나를 파괴시키고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피로가 아닌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을 경험하는 피로, 삶의 틈새를 조금씩 열어가는 피로 ,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으로 녹아드는 피로... 서로를 만지고 만져지는 피로, 서로를 보고 보이는 피로를 경험해야 한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피로는 무장을해제한다... (p 72)


쓸모없음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 피로의 날이다. 무위의 날이다

무장을 해제해도 되는 날이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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