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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꽃    / 김춘수의  꽃

 시방 나는 위험한 짐승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아 주는 이 없는 공터. 꽃들은 온몸으로 발화한다. 꽃들의 개화는 농염하다. 꽃은 줄기에 비해 화려하고 크다. 식물을 식물답게 하는 힘은 줄기에도 있고 뿌리에도 있지만 사람들은 오직 꽃만 본다. 줄기 없는 꽃은 죽은 꽃이지만 벌과 나비의 관심은 오직 꽃에 있지 줄기가 있지 않다. 

 우리가 흔히 어떤 식물을 기억하는 것은 꽃을 통해서다. 꽃은 화사하고 요염하다. 잎사귀 모양이나 크기, 꽃의 색깔, 꽃 모양을 바탕으로 주로 어떤 식물의 이름을 짓는다. 줄기를 보고 꽃의 이름을 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줄기는 어느 꽃에서나 주목받지 못하는 가늘거나 통통하거나 길거나 짧은 초록 줄, 단지 통로처럼 여겨진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은 연초록 가는 줄기의 흔들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꽃이라는 어마어마한 우주를 머리에 이고 바람을 견디고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는지 줄기가 꺾여 있다. 꺾인 줄기에 매달린 꽃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지 못한다. 꽃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줄기가 도드라져 보인다. 꽃은 지고 없어도 줄기는 여전히 살아남아 끝없이 물질들이 이동하는 통로로 작동할 것이다. 어느 순간 열매가 맺히면 줄기는 또다시 열매를 이고 있다. 줄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꽃도 열매도 없다. 연초록 가는 줄기가 시리도록 눈에 박힌다.  


       

대충 피는 꽃은 없다    / 꽃의 기억 

  늘 바라보는 나무, 같은 위치에 핀 꽃도 같은 꽃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벚꽃을 바라보기 위해 같은 위치에서 같은 나무를 올려다보는 우리도 같은 모습이 아니다. 꽃도 우리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변해간다. 나무들은 긴 시간 동안 이듬해 봄을 준비한다. 나무들의 몸 안에 꽃이 될 눈, 잎이 될 눈이 자라고 있다. 나무들은 어떤 가능성을 만들고 있다. 나무들은 꽃 한 송이에 전부를 바친다. 개나리 겹동백, 이름 모를 자잘한 꽃들, 꽃들은 어떤 기억을 품고 있을까? 꽃에게 작년이라거나 내년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다. 꽃은 한 생을 살다갈 뿐이다. 오직 지금이라는 시간, 꽃들에게 허락된 시간 동안 꽃은 온 생을 다해 살아간다. 대충 핀 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꽃은 어느 순간 지고 잎과 열매는 꽃의 기억을 삼킨다. 꽃들은 어떤 기억을 품고 있을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 나무가 잉태한 최초의 꽃으로 더듬어 올라가 본다면. 나무는 피고 지는 꽃들의 기억들을 모두 품고 있을까? 같은 나무에 핀다 해서 똑같은 꽃은 단 한 송이도 없다. 전혀 다른 향기와 빛깔로 저마다의 생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나무들은 꽃들의 경쟁을 안다. 꽃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꽃들은 고정되어 있으나 움직이고 있다. 하늘거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꽃들은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절박해진다. 나비와 벌을 온몸을 다해 부른다. 춤으로 향기로 색으로, 생김새로, 어느 한순간 피어나고 어느 순간 조락을 맞는다.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에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을 왜 시인은 위험한 짐승이라 하였을까..

어려운 시.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실존의 의미 찾기에  대한 주지주의적인 시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처럼. 끝내 알 수 없는 , 끝내 이를 수 없는 것들... 무영의 어둠에 불을 밝히고 한 밤에 울고.. 그 울음이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고 돌에까지 스미어 금이 될 것이라 해도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는 허무함.  무딘 촉수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고난의 몸부림을 거듭하지만 존재는 얼굴을 가리고 좀체로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꽃을 위한 서시'를 쓴 시인은 이미 이곳에 없다. 

사람은 어디론가 떠나고 그의 시만 남아 해마다 꽃피는 시기에 그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꽃들이 도발적으로 피고 있다. 꽃의 기억을 품고 피어나는 꽃들, 여전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벌어진 틈 사이로 꽃들이 들어와 자리 잡는다.  4월. 벚꽃이 일시에 만개해있다. 마른나무에 새하얀 눈이 내린 것처럼.. 여전히 마스크로 가린 얼굴.

 그래도 봄은 피어나고 있다. 

꽃들은 단 한 번도 개화를 연기해본 적이 없다.  꽃들은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대충 피어 본 적이 없다고  온 몸으로 발화하고 있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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