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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말하는 것,침묵하는 것,꿈꾸는 것,잊는 것

그 사이에 우리들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래된 시집에서 확인한다

책꽂이 앞에서 책을 찾다 한 참을 멈춰 선다.

도그지어(dog'ear)로 표시된 부분.. 그 시절의 나는 왜 그 페이지에 삼각 표시를 해두었을까

지금은 아무리 보아도 마음에 어떤 울림도 주지 않는 그 페이지에 오래전 나는 어떤 단어 하나에 어떤 문장 하나에 흔들렸던 것일까.

메마르고 삭막해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감탄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젊은것이리라.


오래전 사무실 동료나 선배나 지인... 시집을 빌려주고 나면 어떤 시를 그 혹은 그녀가 유심히 읽었는지 흔적을 더듬어보곤 했다. 그 수많은 시 중에서 저마다의 가슴을 관통하는 시들은 달랐다. 

화학을 전공했던 교육 연구사님. 그분이 내게 빌려간 시집에 도그지어를 해두었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책을 찾다가 책꽂이 앞에 멈춰 선 것은 오래전 그분이 빌려갔던 빨간 표지의 조병화 시집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조병화의 시 '인생은'에 삼각 표시가 되어있고 그곳에 나의 메모 DS.KIM이라 적혀있다. 


< 인생은 >

                    - 조병화-

인생은 생명으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리움은 뜨거운 사랑이며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하늘인 것을


하늘은 영원한 것이며

영원은 항상 고독한 것을


아. 그와도 같이

인생은 사랑으로 이어지는 황홀한 희열이며

아름다운 적막인 것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 그는 인생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시절 내 눈애는..

생명에서 시작하여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것...

... 인생은 황홀한 희열이며 아름다운 적막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 시절 알아버린 그분은 지금 어쩌면 고인이 되셨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전이라 그분의 세례명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삼각 표시로 접어두었던 시... 그리고 그 옆에 '마음이 시려 견딜 수 없는 오후'라고 적혀있다..

 

<낙엽수 사잇길을 걸어간다>

                                조병화


낮이나 밤이나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진정 내게 고독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 그 어느 미래로 통한

혹은 나와 같은 그 어느 체취를 호흡하는 생각에

어리던 시절과 늙었을 그 시절 사이를 비비고

걸어가는 생각에

아 그것은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인 가기에

나는 몇 번이고 이 길의 종점을 알고 싶었다

허나 허나 나는 그것을 무서워한다

내가 애써 찾아온 것은

모두 소용없는 것이었고

이미 청춘이 다 지나간 이 길가에 서서

오늘도 나는

쓸데없는 곳만 기웃거린다

나 아닌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다

행복치 않는 나를 위하여

행복치 않은 곳을 방황한다

내 무서운 미래를 잠시 잊어버리기 위하여

무서운 곳으로 점점 깊이 기어 들어간다

낮이나 밤이나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진정 내게 고독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다...


시인은 낮이나 밤이나 이 길을 걷는 것이 진정 고독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사실은 진정으로 고독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걷는 길의 종점을 알고 싶은 것..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래는 두렵고 무섭다. 행복치 않은 나를 위하여, 행복치 않은 곳을 방황한다... 그 시절의 내가 그러하였으리라

20대의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하고 수없이 흔들리던 때.  젊다는 것은 흔들림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흔들림에 버거웠던 시절...

폐허가 된 기차역, 철길을 따라 끝없이 걸어보고 싶었다. 기차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간이역에... 철길은 여전히 끝없이 나있고 그 철길의 끝에 이르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까...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시절.

기찻길의 끝까지 가보지 못하였다. 돌아서서 다시....... 뒤돌아 오던 곳을 향하여..  지극히 사소한 일상 속으로 복귀... 어쩌면 지루하고 비겁한 복귀... 


찾으려던 책은 끝내 찾지 못하고... 빨간 표지의 시집에서 오래전 나의 흔적을 만난다. 누군가들이 접어놓은 수많은 삼각형들이.. 그 시절 그들의  가슴에 박히는 언어들이었을 것이다.

시집의 한 귀퉁이를 접어둔 그 시절의 인연들... 지금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옥타비오 파스는 시를 다음처럼 정의한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 옥타비오 파스 -     


보는 것과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과 잊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 시가 있다고

옥타비오 파스의 말처럼 우리들의 인생도 보는 것과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과 잊는 것... 그 사이에 존재하리라..  보고 말하고 침묵하고 꿈꾸고 그 모든 것을  일시에 잊어버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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