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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출간에 부쳐

존재의 언어로, 부딪침과 느낌과 직감으로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작가로서는 영예라 할 수 있는 2020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을 수혜로 작품집 집필에 들어간 지 어느새 2년이 지났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출간을 염두에 두고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하였습니다. 투고를 한다고 즉시 회신이 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지도가 높은 출판사일수록 투고하는 이들이 많아 원고를 검토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선생님의 아름답고 참신한 원고를 출간할 수 없어 대단히 아쉽습니다."로 시작하여 "선생님의 에세이는 독특해서 반드시 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등등.. 투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대부분 끝이 납니다.

거의 익숙한 패턴의 회신들. 투고하는 이는 그런 것들에 무덤덤해져야 합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자신의 원고와 결이 맞는 출판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원고를 통해 서로의 '마음'이 연결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이 맞는 출판사를 만나는 것도 결이 맞는 편집자를 만나는 것도 저자에겐 또 다른 기회이며 축복입니다. 


문득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기쁨의 시간이면서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빛과 어둠의 공존, 지혜와 어리석음의 공존, 믿음과 불신의 공존, 모든 것이 눈앞에 환상처럼 다가오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습니다. 

비단 ‘책’뿐만 아니라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2년 봄부터 시작하여 장미의 계절을 지나 여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교정과 퇴고를 반복하여 마침내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이 태어났습니다.

내 손을 떠난 이 한 권의 책이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기를 소망합니다.   

    

*프롤로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만족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든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그 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너에게 모든 것이 열려 있으니 걸음을 옮겨라. 두 다리가 지쳐 무거워지면 너의 날개가 자라나 너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 올 것이니.

  잘랄루딘 루미


세상의 모든 ‘첫’에게     

  ‘첫’이란 단어에는 기억이 존재할 리 없습니다. 첫 발자국, 첫 만남, 첫사랑, 첫 작품……. 

어떤 정해진 길도 없는 곳에서 ‘첫’은 태어납니다. 그러하기에 ‘첫’은 날 것의 시행착오가 만들어내는 혼돈과 길들지 않는 야성의 설렘이 공존합니다. ‘첫’은 모든 것의 처음이며 자신만의 원형질입니다. ‘첫’은 자신으로부터 나온 길이고 자신의 내면을 향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첫’을 찾기 위한 혼돈의 시간을 거쳐 왔습니다. 어떤 ‘첫’은 나답지 않았고 어떤 ‘첫’은 자기 과시와 위선이 또 어떤 ‘첫’에는 과장된 슬픔이 또 어떤 ‘첫’에는 과도한 욕심이 들어있었기에 그 어떠한 ‘첫’도 진정한 ‘첫’이 될 수 없었습니다. ‘첫’ 인척 하는 ‘첫’들을 내려놓고 나다운 ‘첫’을 찾아 나섰습니다. 적당한 욕망과 적당한 의지,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적당한 관심, 길들여진 감정들이 뒤섞인 스투디움(studium)을 지나 어느 날 문득 어디선가 날아와 가슴에 박힌 뜨거운 화살과도 같은  푼크툼(punctum)을 거쳐 오직 나만의 ‘첫’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어원은 ‘흙’이란 뜻의 라틴어 ‘Humus’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흙의 온기를 지닌 사람들, 자기 안의 습도를 간직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 나의 ‘첫’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첫’이었던 흔적들을 품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밤새 내린 눈 위로 첫발을 딛던 날, 눈 위에 찍힌 명징한 표정처럼 ‘첫’의 기억들은 때론 부서질 듯 강렬하고 때론 찬란하게 슬프고 때론 고통스럽게 아름답습니다. 사람이기에 겪는 모든 것들 희망, 사랑, 슬픔, 허기와 결핍, 시메르를 지는 고통, 절규, 기다림, 존재와 부재, 욕망, 태어날 때의 울음을 기억하는 일, 분노, 고독, 익숙함과 낯섦 등을  ‘첫’ 안에 담아두었습니다. 

  그렇게 모아둔 ‘첫’들이 모여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은 사람을 알아가는 일이고 사람다움의 습도와 온기를 지켜가는 일입니다. 저마다의 원을 넓혀 서로의 경계를 보듬고 숲에서 들려오는 희망의 북소리를 찾아 부단히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 안의 꿈들이 뭉쳐 꽃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회색 빌딩 숲, 틈과 틈 사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어딘 가에서도 사람들이 일제히 꽃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거룩한 봄의 화관입니다. 뭉클거리며 피어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아직 못다 한 꿈들의 ‘첫’입니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은 사람과 사람, 존재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책으로 미술 전문 에세이는 아닙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로 명화를 인용하였지만 명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견뎌내어 마침내 피어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부적으로는 존재의 의미 찾기, 존재의 자국들, 존재와 타인, 존재의 변주곡 4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삶의 길목에서 마주친 수많은 ‘첫’들이 모인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이  세상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마음 안에서 잊혀버린 온기와 습도를 불러올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첫’을 모으면서 ‘작가(作家)’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단순히 쓰는 사람이 아닌 ‘집’을 짓는 사람, 흙과 돌과 나무와 철근을 모아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들을 모아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칩니다. 끝없이 자판을 두드리던 불면의 시간이 만들어낸 ‘첫’들이 내 집 짓기의 재료입니다. 생각들을 부수고 허물고 다시 세워가는 일, 그 생각들을 붙잡아 끊임없이 쓰는 일이 집 짓기의 기본입니다. ‘첫’들이 모여 집의 기둥이 되고 지붕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아직은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완벽한 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적당히 지어진 집이란 집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쓴 커피를 마시며 무언가를 끝없이 쓰면서 내 안의 나를 다 써버리고 싶었습니다. 적당히 쓴맛이란 있을 수 없듯 적당히 쓴 글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첫’이란 단어에는 ‘적당히’란 단어를 붙일 수 없습니다. 적당한 ‘첫’이란 어쩌면 ‘첫’에 대한 모독 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이 나를 다 써버린 첫 흔적이면서 또한 이 책을 읽는 당신의 가슴에 아주 작은 그러나 아주 깊은 첫 흔적이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첫’에도 기억이 존재할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누군가 가만히 ‘첫’에 어울리는 이름을 불러준다면 나의 ‘첫’에도 두 번째의 설렘이 내려앉을 것입니다.  

삶은 짧지만 하나의 강렬한 축제입니다.     

    이천이십이 번째 여름 려원


출간... 글을 쓰는 이들이 책을 내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책을 사거나 읽으려는 이는 갈수록 줄어드는데 해마다 책을 내려는 이들은 늘어나는 기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책들. 그 책들은 결국 누군가의 외침이고 숨결이고 목소리이며 눈물이고 하소연이고 희열이며 설렘이며 불면의 시간이며 상처의 기록일이지도 모릅니다.

대형서점 신간 코너 인기 매대에 얼굴을 잠깐이라도 내밀 수 있는 책은 그나마 축복받은 책이겠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소리 소문 없이 태어나 흔적 없이 서고 한 구석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책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광고, 홍보 마케팅을 누리지 못한 가난한 책들의 최후이기도 합니다. 가끔은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이름’(유명세) 이 글을 쓰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작가들은 소설가이거나 시인이면서 소설도 시의 영역도 아닌 수필(산문)집 하나쯤은 쉽게 내고,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판매 실적으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여러 출판사가 베스트 작가의 글을 동시에 출간하다 보니 같은 해에 비슷비슷한 내용의 에세이가 출판사만 다르게 출간되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서점의 메인 매대에 드러누운 베스트 작가들의 책은 놀라운 판매 실적으로 출판사의 기대에 부응합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을 내건 광고 홍보 전략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 작가와 작품에 대한 마니아 층이 두터울 것이며 작가의 뛰어난 역량, 탁월한 문장력, 참신함, 재미, 감동, 유익함 등등의 요인들이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유인가가 되겠지요. 나 또한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출간 전부터 예약 구입을 걸어놓기도 합니다. 그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열망 때문입니다. 


수필가로 등단을 하였지만 나는 유명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어설프게 ‘작가’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단지 책을 좋아하고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에 내 안의 것들을 붙잡아 활자로 만드는 유희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면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를 헤아린다면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무언가를 쓰고 싶어 견딜 수 없다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이미 모두 ‘작가’인 셈입니다. ‘등단’이란 글을 쓸 기회를 더 부여받을 뿐이지 글을 쓸 자격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글은 등단한 자만의 특권이 아니니까요. 

세상의 어떤 책도 ‘대충’이란 말이 통할 수 없음을 한 권의 책을 만들면서 다시 깨달았습니다.

작가들에게는 작품집 발간의 최고 기회라 할 수 있는 아르코 문학창작기금(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을 수혜 하면서 특별한 작품집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호기를 부렸습니다. 생각해보면 ‘특별하고 완벽한’ 작품집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 한 권의 책을 완성하기에 나는 너무도 부끄러운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쓰다 멈추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한 겨울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한 무리의 여인들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세상은 순식간에 거대한 화원처럼 보였습니다. 햇살 아래 뭉클거리며 피어나는 것들. 사람도 꽃처럼 피어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마다의 온기와 습도를 품고 사람들. 문득 사람에 대한 책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룩한 화관 속, 사람은 누구나 꽃으로 존재한다. 어떤 꽃으로 기억될까. 가는 줄기에 의지하여 흔들리며 살아가는 꽃, 몸이 대지와 수평을 되는 그날까지 직립하며 세상의 모든 것들에 맞서며 온몸을 다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꽃들이다. 사람도 때로는 그렇게 피고  그렇게 진다."                

       - 존재의 변주곡 < 어떤 꽃으로 기억될까> 부분           


내 안의 나를 다 써버리지 못한다면 삶은 얼마나 아쉬움으로 남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어정쩡하게, 비겁하게 자신의 생으로부터 비켜서 있는 나, 세상을 핑계 삼는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삶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살아가야 합니다. 생명(生命)이란 곧 '살라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기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내 인생의 시간에 징검돌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헤세의  말을 밑줄 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나’를 살지 못한다면 나는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는 헤세의 말에 위로를 받던 밤들을 지나왔습니다.

누구든 오롯이 ‘나’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에 공감하면서.

           

 "누구의 무엇이 아닌 오직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을 담은 앙리 마티스 스타일의 모나리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는 가장 본질적인 모습의 나를 생각했다. 왜 그것에 이르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니체는 자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다. 온전히 나로 살아보는 일과  자신을 극복하는 일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의미다. 나로 살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 나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해버린  시간이 얼굴에 원하지 않는 자화상을 그려 버린지도 모른다. 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나'를 온전히 다 써버린 순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거울 속에 도착한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가 오기를 …. "

     - 존재의 의미 찾기 <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 부분 


P 218쪽  

  거울 속 내가 거울 밖의 나를 응시한다. 거울에 비치는 몸을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포장하지 않은 민낯, 세월의 옹이와 굴곡을 그대로 지닌 몸. 지난한 세월이 그려낸 무늬가 정직하게 새겨져 있다. 조금 더 생기 있는 몸, 조금 더 행복한 표정의 얼굴을 만들 수는 없었는지 거울 속 내가 거울 밖의 내게 묻고 있다. 수없이 풍화, 침식, 퇴적의 과정을 반복하는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왜 그리 친절하지 못하였는가를, 왜 그리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는가를  묻고 있다. 

  다시 검은 눈동자를 응시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살아온 시간이다. 골짜기처럼 깊게 파인 주름, 처진 얼굴, 슬픈 눈동자조차도 신화의 증거다. 날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화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오직 자신에게만은 부끄럽지 않은 신화를 써야 한다고 거울 속 나를 보며 다짐한다.

  쌓아온 적막과 무수히 부숴 온 폐허 속에서 피곤에 지친 눈, 사랑에 주린 눈으로 나를 마주 보고 서 있다. 어느 순간 나와 나 사이 파랑 바람이 불어오고 연초록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면 그때가 바로 부끄럽지 않은 신화의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3부 존재와 타인. < 당신과 나 사이 파랑 바람이 불어옵니다 > 부분    

      

우리는 날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신화를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자판을 두드리며 화면에 수많은 글자들을 빼곡히 채워 넣는다고 하여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들이 뭉쳐 나의 생을 채워갑니다. 그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몫이기도 합니다. 영예든 부끄러움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P 303

인정해야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과 인정하고 싶었지만 인정해서는 안 되는 일들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익숙한 곳으로부터 자신을 추방하지 않고서는 어떤 전진도,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껍질을 벗어던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낯섦을 받아들이는 일, 물컵이 있는 우산을 접어버리는 일, 온몸으로 비를 맞는 일 그리하여 어떠한 나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어떠한 나도 인정하는 일.      

   존재의  변주곡 <무엇으로부터의 추방인가> 부분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유명한 문학평론가의 글이 실려서 내 산문집을 돋보이게 하는 것보다 스스로 내 책에게 주는 헌사 같은 것을 쓰고 싶었습니다.   

  

에필로그     


어디선가 오고 있을 미지의 당신에게           

“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눈에 띄는 대로 모든 것을 읽는다. 신문, 교재, 벽보, 길에서 주운 종이 쪼가리, 요리법, 어린이책, 인쇄된 모든 것들을”     

“ 무엇보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할 일은 쓰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쓰는 것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누구의 흥미를 끌지 못할 때조차, 그것이 영원토록 그 누구의 흥미도 끌지 못할 것이라는 기분이 들 때조차, 원고가 서랍 안에 쌓이고, 우리가 다른 것들을 쓰다 그 쌓인 원고들을 잊어버리게 될 때조차.”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 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책과 함께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서재에서 풍기던 책들의 냄새. 후각에 각인된 그 냄새를 쫓아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책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한 시원이었을 것입니다.

가끔 책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책은 태어남과 동시에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베스트셀러의 영예를 누리고 온갖 찬사를 받지만 어떤 책은 존재조차도 알리지 못한 채 눅눅한 서가 한 구석으로  밀려납니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정받고 주목받기를 바라지만 주목 받음이 반드시 그 사람의 삶을 오롯이 증명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어느 누구의 삶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듯 세상에 태어난 그 어느 책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중략...)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한 권의 책은 어디선가 오고 있을 당신의 관점에 따라 재해석되어 수천수 만권의 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책에도 분명 책들의 길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처럼.

이 한 권의 책에는 지난 시간 동안 쉼 없이 읽어왔던 수많은 책들의 흔적과,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들을 붙잡던 불면의 밤과, 깊은 한숨과 나를 관통해간 바람과 햇살, 소소한 기쁨들, 쓰디쓴 커피와 고독한 시간, 형제가 보이지 않는 무기력들과 누군가를 위해 흘렸던 눈물들, 혹은 어떤 들뜬 열망과 설렘의 기억이 오롯이 담겨있습니다.

 내 안의 수많은 목소리들을 붙잡아 활자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전하고 싶은 말,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들은 많지만 이제는 책에도 책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 손을 떠난 이 책이 당신의 책꽂이에 정박하여 축제처럼 아름답고 죽음처럼 불가능한 기억들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미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알지 못하더라도. 

  이천이십이 번째 여름         당신의 려원 


한 권의 책을 잉태하는 것에는 어떤 미묘한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듯합니다.  책 속에 담긴 것들은 목소리들의 흔적일 것이고 시간의 발자국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첫’은 부끄러움의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어미’에게는 똑똑하고 빼어난 자식보다 어딘지 부족하고 어설픈 자식을 더 품어주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잉태의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저자인 나의 몫이고 잉태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책의 몫입니다.  나의 ‘첫’이기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책의 몫이 아닌  온전히 저자인 나의 몫입니다. 

부디 내 손을 떠난 이 한 권의 책이 이름 모를 당신의 책꽂이에 정박하여 축제처럼 아름답고 죽음처럼 불가능한 기억들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미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알지 못하더라도. 


깊은 밤 그리고 이른 새벽...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쓰는 세상의 모든 이들과 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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