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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하는 일

『다섯 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하는 일

『다섯 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인간은 모두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얻지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말을 스스로 선택해 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한다. "         


P 166

“ 다른 산들은 다 이름이 있는데 왜 다섯 번째 산은 숫자로 불리는 건가요?”

“사람들이 그 산에 어느 특정한 신의 이름을 붙이면 나머지 신들이 분노해서 땅을 파멸시킬 거라는 전설이 있어요.  성벽 너머 보이는 다섯번째 산이라서 우리는 그 산을 다섯번째 산이라고 불러요. 그렇게 우리는 아무도 노엽게 하지 않고 우주는 제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죠.”          


파울로 코엘료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연금술사』의 강렬한 메시지를 기억할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온 우주는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

코엘료는 작가의 말에서  이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강조하며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한다.

1979. 8. 12 서른 살이던 그는 음반 제작자로서 정점에 서있었다. CBS음반회사의 브라질 지사장이었고 미국으로 가서 음반회사 최고 경영진을 만날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문학을 하고 싶었으나 브라질에서 문학으로 먹고살 길은 요원했다. 문학의 꿈을 접고 다국적 음악 산업의 찬란한 미래의 손을 잡기로 결심한 다음 날 사장으로부터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해고 통지를 받는다.     

코엘료는 『다섯번째 산』을 집필하면서 오래전 그 일을 떠올렸다고 적고 있다.

인생의 어떤 순간, 우리는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맞닥뜨리게 되고 원하는 길로 가는 지름길 대신 수없이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한 길을 걷곤 한다. 그의 말을 빌면 ‘자아의 신화’에 이르는 과정, 그 과정은 원하던  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걸어야만 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짐’을 향한 순례였음을 깨닫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세상의 일에 직면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지에 선다.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와 포기하느냐의 갈림길.      


『다섯번째 산』은 엘리야라는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한 여정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엘리야는 삼나무를 사들여 자신의 목공소에서 물건을 만드는 목수였다.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듣고  그 목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아합 왕의 병사들이 활을 쏘아도 죽지 않는 그에게는 살아남아 완수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활을 겨누던 병사 앞에서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은 고통은 순간에 불과하리라는 생각,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은 의미, 신이 살리신 의미를 쫓아 신이 부여한 사명을 완수해야 했다. 인간은 살아가는 수많은 나날 동안 스스로는 아무 결정도 내릴 수 없음을 깨달으며  아크바르로 떠난다.


P 47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저버리기 위해 태어났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저버리는 건 어쩌면 하느님이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이 가능하던 시절의 꿈을 심어놓고는  다른 일을 보러 떠나 버렸다. 세상은 변했고 인생은 더욱 어려워졌으나 주님은 인간의 꿈을 변화시키려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P 53

" 배움의 일부였어. 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향해 가다 보면 방향을 틀어야 할 때가 종종 생기기. 때로는 그를 둘러싼 외부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항복해야 할 때도 있어. 그 모든 것이 배움이야. “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어, 때때로 세상과 타인이 자기보다 강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비밀을 바로 이거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목수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엘리야에게  주어진 신의 사명 앞에서 엘리야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 너는 누구인가?”

“ 나는 모른다.”               

p 67

"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고난의 시기가 있고 우리가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쳐오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 무슨 이유가 있지?”“ 고난이 닥치기 전이나 고난을 겪는 동안에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야 그것이 닥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을 도와준 과부, 그리고 그녀의 아들과 아크바르의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과부의 아들이 병이 들어 또 다른 시련이 닥쳐오고 사제장은 그에게 다섯 번째 산으로 올라가 신으로부터 직접 형벌을 받거나 아니면 사람들의 손에 의해 처형될 것이라 말한다.     

회의와 절망에 휩싸인 엘리야에게 천사는 단호하게 말한다.

“누구나 자기 사명을 의심하고 때로는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단 하나는 사명을 잊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자는 자격이 없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과부의 아들을 살려낸 엘리야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나약한 인간을 필요로 하는지 언젠가는 이해될 날이 오기를 바랐다     

“저 앞에 다섯 번째 산이 보이십니까?”

“같은 산이라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습은 달라지지요. 하느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모두 같은 하느님의 수많은 모습인 것입니다.”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마음속 바람이 아니라 각자의 실천이었다.     

아시리아 군이 아크바르를 공격할 날이 다가오는데 총독과 사제장, 수비대장은 저마다 적을 대항할 방법과 전략이 달랐다. 저마다 욕심과 욕망의 차이였다. 


엘리야는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기도한다.

“여기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나요?”

“네가 무너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을 배웠을 때다. 너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젊음을 잃었다고 탄식하지 않도록 매 순간을 잘 활용해라. 주님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각자의 나이에 맞는 근심거리를 안겨주신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사랑’이라 새긴 점토판을 건넨다. 과부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마음이 일지만 그 또한 사명의 일부인지 사명을 방해하는 요인인지  엘리야에게는 혼돈스럽기만 하다. 

“ 기적은 네가 사는 동안 오직 한 번 일어날 것이다. 기적을 이곳 아크바르를 아시리아로부터 지키는 데 쓸 것인지 아니면 네 민족을 이세벨의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 네 조국에서 일으킬 것인지는 네 선택에 달려있다.”

아시리아 병사들이 여인의 집으로 찾아와 불을 지르고 여인은 죽음을 맞는다.

“이제부터 나는 아크바르예요.”

여인의 죽음 앞에 엘리야는 하느님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따져 묻는다. 왜 호의를 베푼 선한 이들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왜 악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인지.     

젊은이들은 몰살당하고 폐허가 된 아크바르에서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과 함께 도시의 재건을 꿈꾼다. 폐허가 된 도시 더 이상 아무것도 취할 게 없는 도시에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모순된 사실. 

“ 주님 이는 모두 당신이 벌이신 일입니다. 당신은 당신 말씀대로 이루셨고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들만 땅 위에 떠돌고 있습니다. 아크바르는 그런 자들이 머무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신을 수습해 태우고, 먹을 것을 모으고, 아크바르의 재건을 위한 일들을 하나씩 시작한다

그를 배척하던 이들은 아무것도 없음의 상태에 이르자 비로소 그의 재건에 힘을 보탠다.     


엘리야는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의심과 패배와 망설임의 순간으로부터 달아났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를 피할 수 없는 심연으로 인도하셨고 그렇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어떤 이름을 갖는다는 것.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얻지만,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말을 스스로 선택해 자기 삶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축복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아크바르입니다.” 그 여인이 말했었다.

도시 하나가 파괴되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후에야 엘리야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뜻을 깨닫는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삶에 ‘해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폐허가 된 아크바르에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 저마다 자신의 삶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해야 했다. 

“ 당신께 맞섰으나 부끄럽지 않습니다. 당신께 맞서며 부모의 뜻이나 나라의 관습 때문이 아니라 혹은 당신께서 주신 사명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저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온전히 저의 의지로 당신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께서 저를 축복하실 때까지 당신께 맞서는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실 폐허가 된 아크바르를 다시 세우는 일은 하느님께 맞서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만나는 일이었다.     

우리의 삶을 다시 세우는 일, 비극은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불과하다. 쓰러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

여인과 아이들, 노인들은 모두 힘을 합쳐 아크바르를 재건해나갔다.     

엘리야는 그들 각자 자기 안에 잠들어있던 능력을 깨울 수 있었던 것은 견고하게 그들을 지탱해주던 아크바르가 무너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 노인과 여인, 부모 잃은 어린아이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열정으로 가득 찬  다양한 나이의 젊은이들, 자신의 삶에 새 이름을 부여한  젊은이들 뿐이지요.”

 p 304

주님께선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계속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저마다 미래를 정해놓고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삶에 길들여져 나아가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께서는

“ 이자들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없는가? 그렇다면 제자리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아크바르의 견고한 성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인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인생을 그대로 온전히 살아내기로 했지요.          

사막의 바람은 우리가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을 이미 오래전에 지워버렸어요. 하지만 나는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살아있는 매 순간 기억할 것이에요. "    

엘리야는 아크바르의 총독이 되었고 주님은 아크바르가 다시 세워지자 이스라엘로 떠나기를 명하셨다.     


P 321

" 자기 인생에서 한 단계가 끝났을 때를 알아야 해. 이미 끝나버린 단계에 너무 오래 머물러있으면 그다음 단계의 행복과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거든. 그러면 주님께서 네 존재를 흔들어 깨우치게 하실 수도 있어. “

p 323

“주님은 무한한 권능을 갖고 계시기에  오로지 선한 일만 택하신단다. 우리가 각자의 삶의 끝에 이르면 알게 될 거야. 때로는 선한 일이 악한 일로 둔갑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한 일이며 그 또한 그분께서 인류를 위해 창조한 계획의 일부였다고.”     

과부의 아들은 이 모든 것을 점토판에 기록하였고 엘리야를 대신하여야 아크바르를 다스렸고 엘리야는 한 벌뿐인 옷을 차려입고 나뭇가지 하나는 지팡이 삼아 이스라엘을 향해 떠났다.     

" 산에 오르면 우리의 영광도 우리의 슬픔도 대단치 않아진단다. 우리가 얻은 것이나 잃은 것이 무엇이든 그저 저 아래에 남아있지. 산 정상에 서면 세상이 얼마나 광활하고 지평선이 얼마나 멀리 뻗어 있는지 알 수 있게 돼."

무언가를 이루게 되고 그 '이룸'의 끝에 하나의 지위를 얻게 되자 하느님은 또다시 떠남을 명하신다. 지위에 길들여지고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엘리야의 사명은 총독의 지위와 명예를 얻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섯 번째 산은 이름이 없다. 아마도 그것은 저마다 자신의 인생에서 넘어야 할 산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산에는 위대한 신이 살고 있어 함부로 오르려는 자는 불벼락을 맞으리라는 미신. 신의 분노를 사게 된다는 그릇된 믿음. 

산에 올라야 한다. 그 산에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살던 세계의 한계를 깨달을 수 있다.

이름을 갖는 일, 우리는 태명을 비롯하여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부여받는다. 신생아들에게 이름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주어진 이름으로 평생을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코엘료는 저마다의 삶에 하나씩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서류상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이름.

삶을 규정하는 이름을 자연물에서 찾아야 한다면 나는 ‘바람’이라 짓고 싶다.

바람은 지나간다. 어떤 것이든 바람을 피할 수는 없다.

바람은 잔잔하고 부드럽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일시에 쓸어버릴 정도의 파괴력을 지녔다.

바람은 밤새 나뭇가지를 흔든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릴지, 흔들리게 할지는 바람의 강도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바람에  맞서는 나뭇가지의 의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무언가에 집착하고 얽매이다 보면 대개는 큰 것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바람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간다면 조금은 융통성 있고 조금은 여유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바람의 부드러움과 바람의 강함을,  바람의 온기와 바람의 차가움을, 바람의 감성과 바람의 이성을 모두 품을 수 있다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코엘료. 그가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음반 회사 지사장의 자리로부터 내쳐진 결과였다. 당시의 코엘료에게는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었을까?

느닷없는 해고 통지 앞에 그에게 미래는 아득한 절망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이 코엘료 문학의 바탕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늘 품고 있었던 의문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데 왜 악을 그대로 두고 보시는가?"였다.

선하신 권능으로 악을 물리쳐버리면 억울한 이도, 고통받는 이도 없는 세상이 될 것인데. 지극이 연약한 인간에게 악의 세상에서 ‘선’을 행할 기회를 주시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였다. 악의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는 어렵고 악의 세상에서 악에 물들기가 더 쉬운 나약한 인간들에게.     

파울로 코엘료의 『다섯번째 산』이 그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지름길, 보기에 편한 길, 빠른 길...

인간의 눈에는 지름길로 보이는 길을 놔두고 신은 다른 길을 권하신다.

돌아가면서 무엇을 보게 하시려는 것일까.

낯선 길에서 헤매고 혼란을 겪고 좌절을 경험하며 인생의 또 다른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함이리라.

저마다의 '다섯번째 산'을 넘어서기를........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당신의 생에 대해 뭐라 하든 자신만의 신화를 펼쳐가기를... /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려원

“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만족하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했든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

복잡하게 설명하려 하지 말고

누구나 그 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너에게 모든 것이 열려 있으니, 걸음을 옮겨라,

두 다리가 지쳐 무거워지면

너의 날개가 자라나 너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

 올 것이니" 

 -잘랄루딘 루미-


두 다리가 지쳐 무거워지면 날개가 자라나 

날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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