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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힌남노가 오는 밤, 잠들지 못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과 부끄러움만 남았다

태풍 힌남노가 오는 밤.

옥탑방 베란다의 작은 화분들을 안으로 들여놓았다. 인조잔디를 둘둘 말아 옆으로 밀어 두고 날아갈만한 것들은 모두 안전하게 옮겨놓고...

퇴근 무렵부터 거세진 빗방울에 차들은 조심조심 미끄러운 도로를 달렸다.

경사진 곳에는 물 웅덩이가 생기고... 거대한 화물차가 지나면서 차 유리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바람과 비... 엄청난 위력을 지닌 태풍의 북상에 긴장하는 시간. 깊은 밤..... 태풍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발걸음은 나무를 흔들고 창문을 부술 듯 거칠게 두드리고..... 무언가 울부짖음처럼 들려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멈추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는 무엇에 분노하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 추함, 이기심, 탐욕...

거칠고 거세게...... 팔을 휘저으며 진격한다.


제라늄과 작은 장미화분들을 들여놓은 옥탑방은 작은 화원으로 변했다.

덩달아 들어온 여치 한 마리가 벽에 붙어있다. 갈 곳은 잃은 여치.

여치에게 회색의 벽은 낯설다.  낯선 전등불 아래 여치는 노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베란다 담을 따라 장미 넝쿨을 만들려고 심어둔 커다란 화분 속 장미.

대형 화분이라 태풍에 날아갈 것 같지는 않지만 힌남노 앞에서 가지가 부러질 듯 위태롭다.

컴퓨터를 다시 켜고 무언가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 잠들어야 하는데 잠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지도 못한 채 태풍의 포효하는 울음소리만을 들었다.


멀리 보이는 산 그림자. 검은 어둠 속 점멸하는 작은 불빛들이 태풍 앞에 왜소하게 보였다.

격하게 두드리는 바람의 몸짓 앞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베란다로 나가 부러질 것 같은 들장미의 몸통을 안아줄 수도, 함께 바람을 견디어 줄 수도 없다. 

무력한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관망만 하고 마는 비겁한 무력감.

뉴스에 시시각각 제보되는 영상을 바라보면서도 관망하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어떤 이에게는 뉴스 속 화면이고 어떤 이에게는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장일 텐데... 삶이란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기껏 자다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나의 장미 화분이 무사한지 베란다의 원목 테이블이 무사한지를 살피고 있다. 그러나 태풍이 자신의 생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창밖을 바라보며 장미 화분의 안위를 걱정하는 일 따위는 사치일 것이다.

애써 지은 농사, 애써 만들어 온 것들. 저마다의 삶에서 주춧돌이 되는 것들을 일시에 도미노 놀이하듯 쓰러뜨리고 마는 태풍의 위력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인간에 대한 응징. 세력을 점점 키워가는 태풍의 분노 앞에. 우리가 만들어온 것들은 작은 장난감 같은 것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도미노 놀이 생각이 났다.

작은 집들을 세우고 가느다란 나무 도막들을 일렬로 세워두고 어느 한쪽을 손가락 끝으로 가만히 두드리기만 해도 그 진동과 진동이 전해져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하던 그 지루하고 단순한 유희들이 태풍 앞에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이 도미노 놀이를 위한 장난감처럼 여겨졌다.         

 


 

8. 28일 오후 9시 힌남노가 열대저압부에서 태풍으로 발달한 곳은 일본 도쿄 남동쪽 1천280㎞ 해상이다. 이곳 위도와 경도는 '북위 26.9도, 동경 148.5도'로 힌남노는 '북위 25도 이상에서 발생한 첫 슈퍼태풍'이다.   태풍은 해수면 온도가 26도 이상인 곳에서 발생한다. 수증기가 응결할 때 나오는 잠열이 태풍 에너지원인데 해수면 온도가 26도 이상이어야 태풍이 발생할 만큼 바닷물이 증발한다.

다만 적도는 전향력이 0이므로 태풍이 발생하지 못하고 남·북위 5도 이상에서만 태풍이 나타난다. 즉 '북위 5도 이상인 북서태평양 저위도의 따뜻한 바다'가 태풍의 '고향'이며 여기서 만들어지는 태풍들이 세력이 세다. 힌남노는 이러한 '법칙'을 깨고 탄생했다. 높은 해수면 온도는 힌남노가 '초강력 태풍'으로 세력을 키우고 '매우 강한 태풍'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우리나라까지 북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 기사 내용 발췌-


힌남노의 탄생은 매우 이례적이라 한다. 북상하면서 더욱 세력을 키워가는 엄청난 규모의 파괴력...

인간은 태풍에 맞설 수 없고 대비하고 피하고 견디고 지나가길 바라는 것뿐이다.

태풍 앞에 잠 못 드는 이들. 태풍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이들.

창문을 거세게 두드리던 태풍이... 오늘 아침 거짓말처럼 미풍으로 돌변했다.

창밖으로 전형적인 9월의 하늘이 보인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베란다로 나가 둘둘 말아놓은 인조 잔디를 다시 펼치고

방안에 들여놓은 화분들을 하나둘 바깥으로 옮길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햇볕을 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군가에는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시간일 것임이 틀림없지만.....

이 뻔뻔한 무기력과 해결할 수 없는 불공평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 남아있는 것은 그런 부끄러움뿐이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려원 


조지클로젠의 작품 <울고 있는 젊은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젊은이가 울고 있다.

참회의 눈물이다.

어떤 부끄러움마저도 눈물을 이길 수 없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

가슴으로부터 빠져나가 버린 것들.

상실의 시간과 흔적들

태풍이 지나간 자리..

고통이 다시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는 현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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