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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

허번 멜빌 <모비딕> ,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이렇게 말한다.

고래를 위하여/정호승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를 위하여'를 읽을 때마다  "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에 멈춘다. 마음속에  푸른 바다, 그리고 고래를 담아두려면 얼마나 마음이 넓어야 할지..

마음 한가운데 푸른 바다가 있고, 고래 한 마리 분수처럼 물을 내뿜는 모습을 상상한다.

각박하고 지쳐가는 삶. 마음속에 고래도 푸른 바다도 없다. 어쩌면 사막을 건너는 낙타 한 마리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사막을 건너는 낙타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 그래도 시인은 다음 행을 멋들어지게 표현할 것이다. "인생을 모르는 것"이라고... 


내친김에 오래전 읽었던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다시 손에 든다. 모비딕은 단순한 모험소설이 아니라 수많은 상징과 은유를 품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모비딕에 대해 어떤 이는 인간을 대변하는 에이허브 선장과 자연을 대변하는 모비딕의 대결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에이허브 선장의 그릇된 리더십이 조직을 망치는 예로 들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 남자의 치열한 노력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모비딕(흰 향유고래)을 주인공으로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의 바다에서 인간이 겪는 두려움과 공포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내 이름은 이스마엘이다’라는 독백으로부터 시작한다. 번역가에 따라 “내 이름을 이스마엘로 불러다오.”로 번역하기도 한다.(그렇게 번역된 책이 더 많다)

   작품의 화자(話者)인 이스마엘을 작가 멜빌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이스마엘은 ‘창세기’ 속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에서 왔으며 ‘쫓겨난 자’, ‘떠도는 자’라는 뜻이고 선장의 에이허브는  ‘열왕기’에 나오는 폭군 ‘아합’을 모비딕은 ‘욥기’ 속 바다 괴물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도 한다.


19세기 미국 낸터컷 항에서 이스마엘과 퀴퀘그가 피쿼드호를 타고 고래잡이를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흰 고래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은 뒤 복수심에 불타는 선장 에이허브는 ‘나는 악마가 붙은 미치광이다. 이제 나는 예언한다. 내 다리를 자른 놈의 몸통을 잘라버릴 거라고...’ 소리친다. 

모비딕이 아닌 다른 고래는 그의 관심 밖이다. 

대서양에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태평양으로 끝없이  오직 모비딕만 추격하는데 긴 항해 끝에 일본 근해에서 모비딕 발견하고 3일간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첫째 날 아침, 모비딕이 자신을 공격하는 에이허브의 보트를 박살내고 선원 한 명이 목숨을 잃는다. 둘째 날 정오,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모비딕’에게 작살을 던지며 공격하지만 작살에 연결된 밧줄들이 뒤엉키며 세 척의 보트가 모두 산산조각이 난 채 바다에 빠지고 선원들과 선장은 피쿼드호에 의해 간신히 구조된다. 셋째 날 저녁,  에이허브 선장은 모비딕의 옆구리에 작살을 꽂지만 모비딕의 반격으로 피쿼드호가 통째로 침몰해 버린다. 에이허브 선장의 작살은 모비딕을 명중시키지만 동시에 작살의 줄이 선장의 목을 휘감으면서 선장도 모비딕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피쿼드 호도 선장도 선원도 모두 사라지고, 화자인 이스마엘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이 처절한 대결에서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

피쿼드 호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말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용기는 위험을 바르게 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 겁쟁이보다 더 위험하다는 논리다. 스타벅은 해가 저물면 고래를 쫒는 보트를 내려놓기를 꺼려했다. 고래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고래잡이 배의 선원이 고래를 잡아 고기와 기름을 가득 싣고 항구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용도로 고래를 잡으려다 선원들이 목숨을 잃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등항해사 스탑은 느긋한 성격이었다. 위험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겨내고, 고래에 다가가서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아무렇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며 창을 휘둘렀다.

삼등 항해사 플라스는 고래를 죽이는 것만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타벅의 작살잡이는 퀴퀘그, 이등항해사 스탑은 인디언 테슈케고와, 삼등항해사 플라스크의 작살잡이는  흑인 대그였다. 


소설이란 참 신기한 매력을 지닌다.

처음 모비딕을 읽을 때는 에이허브 선장의 광기 어린 집념과 모비딕과의 대결에 중심을 두고 읽었었다. 또 언젠가는 화자인 이스마엘과 섬나라 왕자 퀴퀘그에 역할에 중심을 두고 읽었다. 이번에는 “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 는 일등항해사  스타벅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고래를 두려워하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가 고래잡이 배의 일등항해사의 말로 적합할 것 같은데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겠다니. 얼핏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사람은 인생의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본다.     

삶이란 바다와 같은 것이고 우리는 모두 은유적으로 보면 어부이다. 무엇을 낚을지, 무엇을 잡을지, 산티아고 노인 일지, 에이허브 선장 일지.... 겁쟁이보다 더 위험한 자가 두려움이 없는 자라는 스타벅의 말은 삶의 바다에서 두려움을 지니지 않는 자는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허먼 멜빌은 왜 작품의 제목을 '모비딕'이라 하였을까. 피쿼드호나 에이허브 선장의 이름을 두고 고래의 이름 

모비딕을 작품 제목으로 정한 이유를 그에게 묻고 싶다. 승자는 모비딕인지? 에이허브 선장인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이렇게 마무리하였다. 

마음속에 푸른 바다도 고래도 품지 못하는 내가 그래도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보고자 함은 

무엇 때문일까.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생각들 때문일 것이다. 스타벅의 말을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인생의 배에 탈 자격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가을바람이 차갑다/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지음

독일어로 종이의 결은 '라우프 리히퉁'인데 '달려가는 올바른 방향'이라는 뜻이다. 나는 나의'결'을 찾아내었을까?... 삶의 '결'들은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이다.... 달려가려는 올바른 방향으로 삶의 결은 나있는 것일까?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지만 올바른 방향이었는지는 달려가 본 뒤에야 알 수 있다.(...)

 세상의 '결'을 따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달려가는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삶에 있어서 최소한 오답은 아닐지라도 정답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존재의 변주곡 : '결'중에서  p311~312>


존재의 언어로

부딪침과 느낌과 직감으로....

또 삶의 바다에 나가야 한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놈은

내 배에 태우지 않는다."는 스타벅의 말을 다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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