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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 그래도 나는 내일의 치후네씨를 받아들일 거에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녹나무의 파수꾼>은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번역한 작품이 아니라 역대 최초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에서 동시 출간됐다.      


"녹나무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녹나무 파수꾼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깨닫는 날이 올 거예요." 

레이토가 일을 시작할 때 들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주거침입, 기물파손, 절도 미수, 유치장에서 감옥 갈 날만 기다리던 청년 레이토에게 치후네가 고용한 변호사가 나타난다. 감옥에서 나오게 해주는 대가로 월향 신사에서 ‘녹나무 파수꾼을 해야 한다는 제안을 받는다. 견습생 레히토는 단순히 나무 하나를 지키는 일로 생각했지만 그믐과 보름날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건한 모습에서 녹나무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한다.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라는 말만을 할 뿐 어느 누구도 녹나무가 지닌 효험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러 오는 것인지, 소원이 이뤄지긴 하는 것인지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지만, '녹나무의 파수꾼'은 아무것도 물어선 안 된다는 경고 조항도 있다.

 녹나무 참배 일지를 컴퓨터로 정리하다가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되고 사지의 딸 유미를 도와주다가 녹나무와 관련된 비밀을  하나씩 알아 간다. 녹나무가 있는 동굴에서 깊은 밤 밀초를 켜고 인지증에 걸린 치후네의 예념을 수념하면서 레히토는 가문의 내력에 대해, 치후네와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치후네의 고민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한 삶을 훌쩍 뛰어넘는 자연물에는 신이 깃드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깊은 염원이 그곳에 신을 불러들이는 것일까.

수령을 짐작하기 어려운 녹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일그러져버린, 실패한 삶에 대한 회한을 기억해주는 장소가 이 책에서는 녹나무다. 한 세대가 그다음 세대에게 간절히 전해주고 싶은 것, 영구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잠재한 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왠지 그 안의 선을 묘사하는 작품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소설에서 선함에 대한 묘사가 악함에 대한 묘사보다 더 어려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 작가의 말 부분 발췌          


레이토는 손전등으로 발밑을 비추면서 녹나무 기념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좌우의 초목 때문에 길이 좁아져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폭밖에 안 된다.

덤불숲을 빠져나가면 문득 시야가 툭 트이고 그 앞쪽에 거대한 괴물이 나타난다. 정체는 녹나무다. 지름이 5미터는 되겠다 싶은 거목으로, 높이는 20미터는 넘을 것이다. 굵직굵직한 나뭇가지 여러 줄기가 구불구불 물결치며 위쪽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큰 뱀이 뒤엉켜 있는 것 같다. 처음 봤을 때는 압도되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땅바닥으로 힘차게 뻗어나간 뿌리줄기도 굵고 복잡하게 불룩불룩 이어졌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발밑을 조심하면서 레이토는 나무 기둥 주위를 왼편으로 돌아들어갔다

거목의 옆구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나 있다. 그 크기는 어른이라도 조금만 몸을 숙이면 너끈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다. 레이토는 신중하게 발을 들이밀었다. 나무 기둥 안쪽에는 동굴 같은 공간이 있고 그  넓이가 한 평 반쯤이나 된다. 나무 벽 일부가 움푹 파여 폭 50센티미터쯤의 선반처럼 되어있다.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사람이 깎아낸 것  같았지만 누가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선반 위에 밀초가 놓여있었다.


*녹나무      

열대의 햇빛 아래 짙푸름의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아름드리의 우람한 몸집을 자랑하는 아열대의 대표적인 큰 나무가 녹나무다. 한자 이름은 장(樟)이며, 예장(豫樟), 향장목(香樟木)이라고도 하며 예부터 좋은 나무로 널리 이용되었다.     

키 40~50미터, 줄기둘레가 장정 10명이 팔을 뻗어 맞잡아야 될 정도로 15미터가 넘게 자란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굵고 키가 큰 나무 중 하나다. 원래 자라는 곳은 열대와 아열대이며, 일본이나 중국의 양쯔강 이남에서도 자라고 있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섬 지방은 녹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북단 경계의 가장자리에 해당한다.(다음 백과 참조)

              


“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과연 어떤 세계인지.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예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가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나는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P. 70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왜 기념(祈念)이라고 하지? 소원을 비는 거라면 보통은 기원(祈願)이라고 하잖아.”

글쎄,라고 레이토는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건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나? 기원이든 기념이든. 말뜻은 별 차이도 없잖아. 여기서는 기념이라고 한다고 해서 나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야.”     

p 312

그런 게 아니라 염원을 하는 것 같아. 염원한 내용이 녹나무에 남는 거야, 컴퓨터로 말하면 녹나무는 기억 매체인 셈이야. 그리고 혈연 관계인 사람만 거기에 접속해서 기록된 메시지를 꺼낼 수 있어.     

P 416

"문답 무용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니까 언어에 의한 메시지와는 다르게 속일 수도 꾸밀 수도 없습니다. 예념 한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그 형태 그대로 수념자에게 흘러듭니다. 띠라서 이용하는 분들의 목적으로 가장 많은 것이 유언이에요. 유언장만으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막연한 마음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으니까요. 야냐기사와 가와 인연이 깊은 명문가 중 당주의 이념이나 신념, 사명감을 후계자에게 전승하기 위해  녹나무의 능력을 이용하시는 댁이 적지 않습니다."

     

“당주들의 가장 큰 바람은 집안이 대대로 이어지고 또한 번창하는 것이지요. 수념을 하는 후계자는 그 마음을 받아들여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전임자의 꿈이 후임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녹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실은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 이념이나 신념을 전할 수 있다고 했지만 염원이란 반드시 청천한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의념,괘념, 집념 그리고 무념처럼 예념자가 품은 다양한 감정들도 포함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잡념이나 사념도 녹나무는 고스란히 전하는 경우도 있어요. 예전에는 미워하는 이의 죽음을 염원했던 일도 많았다더군요. 복수를 해달라, 그런 명령이기도 합니다. “     


P418

“ 수념에  대한 건데요. 누구나 다 잘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녹나무 안에 들어가 예념을 해준 사람을 열심히 생각해도 아무것도 감지하제 못하는 일도 있어요.?”     

“그런 경우가 있어요. 드문 일이 아니에요. 이를테면 혈연관계라고 해도 너무 먼 친척일 때는 수념이 어려워요. 가능하면 3촌 이내, 5촌까지 멀어지면 가능성이 희박하지요. 그리고 근친이라 해도 예념자와 관계가 소원했을 경우, 염원이 전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요인이 있는 모양이라서     


 p 489

아버님의 이념이나 신념은 이미 소키 씨 몸속에 스며들어있습니다. 예념이니 수념이니 하는  절차는 필요 없어요. 적어도 아버지 오바 도이치로와 아들 오바 소키 사이에서는 “          


p484

"기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꽤 많을 거 같아. 하고 싶지 않지만 기념이 그 집안의 오랜 관습인데 그걸 자꾸 안 한다고 했다가는 주위에서 뭔가 뒤가 구린 거 아니냐고 의심할까 봐서, 거꾸로 말하면, 당당하게 기념을 하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는 어떤 거짓도 거리낄 것도 없다고 주위에 과시하는 일이 돼. “          


나무 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봉투에서 촛대를 꺼내 항상 놓는 자리에 앉혔다. 이미 밀초는 꽂혀있다. 후쿠다가 말한 가장 큰 밀초다. 장뇌 향기를 풍기는 공간 속에서 밀초의 불꽃이 흐늘흐늘 흔들렸다. 독특한 향기가 흘러나와 나무 기둥 안을 서서히 채워갔다.... 레이토는 정좌하고 눈꺼풀을 감았다. 머릿속에 떠올려야 할 인물은 단 한 사람...          


p 549

"지금의 내 기분을 예념 하고 싶네요. 언어 같은 걸로는 안돼요. 녹나무를 통해 치후네 씨에게 전하고 싶다고요."˝

˝"고마워요. 하지만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어요. 방금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 오는 게 있다는 걸.˝"

치후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여윈 손을 레이토는 두 손으로 감쌌다...      


념(念) : 속에 품은 마음          

히가시노 게이코의 『녹나무의 파수꾼』을 소원을 들어주는 신비한 나무이야기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녹나무의 임무는 저마다의 가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들어주고(예념), 들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가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으려는 자 혹은 들어야 하는 자에게 전달(수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 차마 말로 하지 못하는 것들을 '녹나무'라는 매개물을 통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녹나무의 파수꾼의 역할은 최소한에 그친다. 녹나무 주변을 관리하고 밀초를 가져다 두고 예약을 받고, 캄캄한 밤 녹나무까지 안내해준다. 녹나무의 파수꾼은 녹나무 안에서 누군가의 념(念)을 엿들어서도 안된다. 파수꾼의 역할은 앞으로도 녹나무가 계속 그 역할을 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도의 역할이다.    

 


나무에 대한 사람들의 기원은 예부터 흔한 일이었다. 시골마을 어귀에는 거대한 나무 한그루 씩은 있고 당산나무 같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은 마을의 중요한 행사 때 나무 아래 음식을 차려놓고 저마다의 기원을 했다.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나무들은 그들의 기원을 다 들었을 것이다.

나는 나무에게 뇌가 있다면 어느 곳에 존재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 몸의 가장 높은 곳에 뇌가 있다. 나무는 뿌리에, 혹은 굵은 줄기의 한가운데, 아니면 가지의 끝마다 뇌가 있을까..... 알 수 없지만 나무의 판단력을, 나무의 영험함을 믿는다.

마음이 부서질 듯 아파올 때 수령 깊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 다녀오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누구든 한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나무는 치유의 힘을 지닌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기억.


심심풀이로 본 사주에서 그가 나는 나무와 같다고 했다. 한 여름의 무성한 나무, 가지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만일 사후의 다른 생이 주어진다면 나는 인간으로의 삶 대신 나무의 삶을 택하고 싶다. 거대한 나무... 『녹나무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나무처럼 누군가의 염원을 새겨듣고, 몸 구석구석에 저장해두었다가 그 염원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역할을... 만일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레이토처럼 월향 신사의 녹나무를 지키는 파순꾼이 되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녹나무에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녹나무에 자신의 생각(선한 혹은 악한, 잔인한, 비겁한, 고독한, 음울한, 기쁜... 등등의)을 전하고 그 생각은 그것을 받기를 원하는 이에게 전해진다. 책에 언급된 대로 녹나무에 자신의 모든 것을 염할 수 있는 자는 더 이상 부끄러움이 없는 자인지도 모른다. 감출 것 하나 없는 존재.     

이 책의 번역자인 양윤옥 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악을 점화시키고 인간의 악을 파헤치는 소설은 흔하지만 인간의 선함을 들여다보려는 소설은 드물다. 히가시노 게이코의 다른 작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같은 맥락이다. 소설이 허구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악함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것보다 인간의 선함을 보여주고 그 선함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일은 의미 있다.


레이토의 삶. 불행한 출생과 그로 인해 빚어진 삶, 어쩌면 인생의 막장이라 불리는 곳까지 가버릴 수 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모인 치후네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간다. 녹나무에게 했던 치후네의 염을 받아들이면서 야나기사와 가문의 미래에도 어떤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지 씨와 그의 형 기쿠호. 피아니스트로 키우려는 엄마의 과도한 욕망이 기쿠호의 삶을 그가 원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렸지만 기쿠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곡을 월향 신사의 녹나무에게 예 염하고 그의 동생 사지가 그 염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머니에게 자신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믿음, 용서와 화해, 이해, 전수, 갈등......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의 바탕에 있다.


"˝그런 말 말고 상상을 해보도록 하세요. 이 세상은 피라미드고 사람은 그것을 형성하는 돌멩이 하나하나예요. 피라미드 전체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상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위를 향하는 것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레이토 하기 나름, 레이토의 자유예요.˝      

위의 말이 치후네가 20대의 레이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인생의 핵심 조언 인지도 모른다.


노란 수첩에 끝없이 모든 것을 메모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의 인지병을 앓고 있는 치후네에게 레이토는 이렇게 말한다. 

"내일의 치후네가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나는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모두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책이다.  녹나무를 통한 세대 전수, 마음 나누기...

밀초를  켜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무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은 얼마나 홀가분해질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정직해질까.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눈 내리던 겨울 메마른 가지 위로 가로등이 켜지던 나무에도 연두가 내려앉았다.

저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나무의 밑동에서 몸통으로 나무의 끝까지 더듬어 올라간다.(...) 

영겁의 시간 동안 나무가 만들어낸 초록의 성찬 앞에 인간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또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지를 실감한다.  


<손바닥들의 아우성은 '여기 있음'의 상징 >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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