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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실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낯선 여인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슈페판 츠바이크 < 낯선 여인의 편지>               


유명 소설가 R은  사흘 동안  산에서 상쾌한 휴가를 보낸 후, 이른 아침 다시 빈으로 돌아와 역에서 신문을 샀다. 그때 날짜를 힐끔 보고는 그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흔한 살의 남자, 얼른 자신의 나이를 헤아려 보았는데 그것이 그에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그건 낯설고 불안한 여인의 필체로 성급히 써 내려간 것으로 스물네 장 정도나 되어 편지라기보다는 원고에 가까웠다. (중략) 보내는 이의 주소와 서명도 없었다. 윗부분에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라는 호칭이 제목으로 쓰여 있었다. 그는 놀라 잠시 멈칫했다. 이것이 정말 나에게 온 건가? 아니면 어느 몽상가에게 온 건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해서 그는 읽기 시작했다.  본문 90쪽      


편지의 시작은

“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였다.     


"처음으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어요. 제 모든 삶을 아셔야 해요. 전 항상 당신 것이었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셨지요... 오직 하나 단신이 저의 모든 것을 믿어주시만을 바랄 뿐입니다.  사랑도 동정도 위로도 원하지 않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를 아주 짧게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유명 소설가 R는 발신인이 나와 있지 않은 낯선 필체의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고 호기심에 이끌려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R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여인이 쓴 것으로, 여인은 자신의 전부였던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도 죽음을 앞두고 평생에 걸쳐 사랑했던 소설가 R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는 내용이다.     

자칫 진부하고 답답하고 어쩌면 순수하고 어쩌면 통속적인 이 소설의 매력은 어디에 있을까?

“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로 시작되는 편지를 통해 

사랑에 대해서는 지극히 통속적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 R은 비로소 한 여인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사랑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눈부신 외모와 명예, 지식, 인기를 바탕으로 수많은 여인들을 자기만족의 대상 혹은 순간적인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며 만남과 헤어짐을 수없이 반복하였기에 그의 집 화병은 늘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룻밤 관계를 맺은 여인에게 화병의 장미 몇 송이를 건네주거나 혹은 뒷말이 나오지 않게 적당한 수준의 돈을 챙겨주는 식으로.... 그는 교묘한 탐닉을 진실한 호의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소설가 R도 알지 못하게 그의 아이들 낳아 기르며 명문가의 아이처럼 키우기 위해 그녀는 몸을 팔아 비싼 교육비를 감당한다. 심지어 나이 든 백작이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그녀 아들의 교육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하였음에도 오직 소설가 R을 생각하여 제의를 거절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연히 클럽에서 마주치지만 R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역시나 하룻밤 인연으로 생각한다. R의 하인만이 눈물을 참으며 그의 집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기억할 뿐.

R은 그녀가 열쇠 구멍으로 자신의 집을 훔쳐보던  앞집 소녀였던 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의 전부였던 아들. 그를 쏙 빼닮은 아들의 죽음으로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고백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아마도 그에게 편지가 도착하고 그가 편지를 읽을 무렵이면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인 전제와 함께. 

    


이 소설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다.

“ 그때 그의 시선이 책상 위 파란 꽃병에 머물렀다. 꽃병은 비어있었다. 지난 몇 년 이래 처음으로 그의 생일에 비어있었던 것이다. 그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문 하나가 여리면서 다른 세계로부터 차가운 기류가 자신의 평온한 공간으로 밀려오는 듯했다. 그는 어떤 죽음을 느꼈고 불멸의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영혼 속에서 무엇인가가 터져 나오는 듯했다.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여인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      


「낯선 여인의 편지」는 1922년작으로 그가 소설 속 인물인 소설가 R의 나이(40대)와 비슷할 때 쓴 작품이다. 1942년 히틀러 정부에 절망하다가 2.22 “ 자유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먼저 떠난다는 유서를 남기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한다.     

1920년대의 사랑으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끝 부분도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생각하듯 육체 없이도 정열적으로 생각했다.”는 마지막 문장은

그 여인의 죽음에 대한 모독처럼도 여겨진다.

그녀의 죽음과 그녀의 사랑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같은 것이었을까.(들려도 그만이고 안 들려도 그만인) 마지막까지도 말이다. 


사실 그녀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는 한 남자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그녀의 사랑법도 정상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원래 논리가 성립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열쇠 구멍을 통해 앞집 R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종일 현관 앞에 웅크린 그녀의 행동은 사랑에 대한 열병이거나 광기이거나 집착일 것이다. 그렇다고 요즘 흔히 말하는 스토커라 보기는 어렵다. R이 그녀의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생활에 방해를 받거나 고통을 받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R은 세상의 모든 여인들에게 친절했고 매너가 좋았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을 즐기는 일종의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웠으니까. 사춘기에 접어든 앞집 소녀가 열쇠 구멍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우정이든 사랑이든 탐닉이든 쾌락이든 그 외 어떤 형태로든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물론 그는 앞집 소녀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지만...       


어떤 이는 이 책이 일회적 사랑이 대부분이 오늘날에 ‘사랑’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책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책이 쓰인 시대 남성들의 사고방식(아내는 정숙하고 순결해야 하고 자신들은 어떤 형태로든 사랑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에 철저히 부합한 책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 책의 장점은 탁월한 심리묘사에 있다.

이름도 언급되지 않은 그녀 모습이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진다. 사랑으로 아팠고 사랑 때문에 살아야 했고 마침내는 사랑 때문에 죽어버린 여자.

다만 그녀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전달되지 않는 편지, 전해지지 않는 목소리 같은.     

그가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하는 아들의 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 몸을 파는 그녀의 삶도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오롯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녀는 정작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꽃병 안의 장미처럼...

언젠가는 시들어버려 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책 한 권 분량의 편지를 그에게 보낸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죽음으로써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편지에 적힌 그녀의 말은 오롯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한다.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늘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을 자기 안에 가두려 한다. 설령 그녀의 표현처럼 과거에는 불성실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범주에 들어온 이상은 성실해지기를 바란다.

가두는 것,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려는 것. 그 순간 사랑은 구속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편지로 그를 처음으로 구속한다. 더 이상 소유할 수 없으므로.

과거에도 그러하였듯 현재도 미래에도 그를 소유하고 구속할 수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소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자만추라는 신조어가 있다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라는 의미이기도 하고 '자보고 만남 추구'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고지식한 내 사고방식으로는 전자에 가깝지만 요즘 세대들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자만추의 시대에....... 갑자기 나는 아주 오래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랑을 하다가,

상대는 불성실하고 자신은 과잉으로 성실한 사랑을 하다가 그렇게 죽어버린 그녀.

죽음으로써 아무 흔적도 없는 사랑을 한 어리숙하고 집요한 그녀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것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를 꺼내 든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도 처절하게 외치고 있다.

"당신은 바로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당신은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  

지금 전 이 세상에 당신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어떤 분이신가요?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밟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서 떠나는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당신은 결코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단코 그럴 겁니다. 그것이 제 운명입니다. 그것이 제가 죽어서도 껴안아야 할 운명이겠지요. 전 당신을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제 이름과 저의 모습을 모르는 그대로 그냥 떠나겠습니다.  

전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           

알 수 없는 것, 여전히.......... 사랑이란........... 그 단어만큼이나 모호하고 난해한 것이다. /려원                    


 P 103

당신은 바로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당신은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그전까지는 학교에 별 관심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갑자기 최고가 되었지요.. 수많은 책들을 깊은 밤까지 읽어댔습니다. 어머니가 놀랄 정도로 고집스럽게 피아노를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 하루 종일 당신을 기다리고 당신을 엿보는 것 이외 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관문에 놋쇠로 된 작은 구멍이 있어서 동그란 그 구멍으로 건녀편 당신의 문을 볼 수 있었어요. 그 구멍이 바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저의 눈이었습니다. 그곳 무지 추운 현관 앞에서 어머니가 의심할까 봐 겁내며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손에 책을 들고 엿보면서 오후 내내 앉아 있었어요. 한 줄의처럼 팽팽하게 긴장해서 당신의 모습이 그 현을 건드리기만 해도 음을 낼 것 같은 심정으로 앉아있었습니다.          

 다시 주위에서 긴장과 감동 사이를 오갔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당신 주위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요. 마치 당신이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시계태엽의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요. 시계태엽은 어둠서 인내심을 가지고 당신의 시간을 재고 들리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당신과 늘 같이하는데도 당신은 성급한 시선을 수백만 번 똑딱거리는 초침 위로 단 한 번 힐끗 던질 뿐, 시계태엽의 긴장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전 당신에 관한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습관, 당신의 넥타이, 당신의 양복을 다 알고, 당신의 지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구별할 수도 있었으며, 누가 내 마음에 들고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도 나누었지요. 열세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매 순간 당신 속에서 살았답니다. 아,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했는지 아실까요! 당신의 손길이 닿았던 문손잡이에 입을 맞추고, 당신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던진 담배꽁초를 훔쳤답니다. 그 꽁초는 제게 성스러운 것이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거기에 닿았으니까요.  수백 번도 넘게 저녁이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골목길로 뛰쳐나갔답니다.   당신의 방들 중 어디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보고 당신의 모습,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존재하는 당신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지요.


P 145     

지금 전 이 세상에 당신 말고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게 어떤 분이신가요? 저를 결코, 결코 알아보지 못한 당신, 물처럼 제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당신, 거리의 돌을 밟고 지나가듯 저를 밟고 지나가는 당신, 늘 멀리서 떠나는 저를 영원히 기다리게 하는 당신은 제게 어떤 존재인가요? 


 P146     

당신은 결코 저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단코 그럴 겁니다. 그것이 제 운명입니다. 그것이 제가 죽어서도 껴안아야 할 운명이겠지요. 전 당신을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제 이름과 저의 모습을 모르는 그대로 그냥 떠나겠습니다.          


P. 134

전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언제라도 자유롭게 남아 있고 싶었습니다. -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 모든 정상적 상황에서 격리되어 죄 없이 감금된 수감자로서, 수개월 동안 교묘하게 고독으로 고문당하면서 쌓이고 쌓인 분노를 오래전부터 어떤 것에든 터뜨리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


P. 105

그 짧은 몇 분, 그것이 제 어린 시절 가운데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P. 123

전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금방 망각하고, 열중하는 동시에 이내 불성실한 모습 그대로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늘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합니다.     


P. 145

모두가 저를 떠받들고, 모두가 저에게 잘해주었는데... 오로지 당신, 오직 당신만이 저를 잊어버렸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만이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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