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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레드, 짙은 침묵, 마크 로스코, 그리고 나

저무는 시간과 다시 떠오르는 시간 사이....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한 해의 끝자락.

올 한 해 나는 또 무엇을 위해 거침없이 달려왔을까?

수없이 멈추고 쉬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걷고 다시 달려온 시간들.

시간의 트랙에 올라서 앞으로만 걸어왔다. 어쩌면 떠밀려 온 것인지도 모른다.     

84일째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운이 다한 산티아고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비록 3박 4일의 사투 끝에 뼈만 남은 거대한 청새치를 끌고 돌아와 그의 존재감을 다시 확인시켜주기는 하였지만... 세상살이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세상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돌아보면 뜻깊은 한해이기도 했다.

산문집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이 2022년 8월 수필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고, 11월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에 선정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부족한 능력을 지닌 책의 어미로서 산고를 거쳐 잉태한 나의 책에게 미안한 마음을 다소 지울 수 있었다. 

또 하나는 다시 신인상을 받은 것이다. 신인(新人)이란 새사람, 예전에는 ‘새색시’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고 하니  다시 처음 글을 쓰는 새색시가 된 셈이다. 글 쓰는 이에게 초심이란 중요한 것이다. '처음'을 잊어버리면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고 자화자찬의 늪에 빠져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무언가에 길들여지고, 무언가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낯설어야 하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끝없이 정신의 촉을 세워야 한다.     


어떤 책을 읽느냐가 곧 어떤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한다고 생각해 왔다. 마찬가지로 벽에 어떤 그림을 걸어두느냐가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할 것이다. 어린 날, 내가 살던 집에는 긴 마루가 있었고 그 마루에는 유리문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긴 마루에 여러 개의 유리문을 달아둔 것도 획기적인 디자인이었는데 마루에 누워 기다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들여다보는 유희를 즐기곤 했다. 마루의 끝과 끝. 한쪽에는 너무도 유명한 그림 고나드의 작품 < 책 읽는 소녀 >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겨울나무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림의 힘일까. 다른 어떤 것보다 나무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니 회랑처럼 긴 마루의 끝과 끝에 걸려있던 그림들이 내 인생의 스승이 된 셈이다.


올해. 2022년 내 작업실의 벽면은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 자리 잡았다. 마티스의 <블루누드>를 책표지로 쓸 정도로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좋아한다.  이제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벽면에 앙리 마티스의 그림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만 2023년에는 마크 로스코의 그림과 함께 지내보고 싶다. 여름휴가 때 이미 절판된 마크로스코의 책을 우연히 여행지의 서점 매대에서 발견했었는데 사 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마크로스코의 그림은 2m 정도 크기인데  감상하려면 반드시 실내조명은 은은하고 어두워야 하고 45cm 떨어져서 감상해야 한다는 말에 궁금증이 생겼었다. 왜 45cm일까? 아직 그의 그림 앞에 서보지 못해서 그만큼의 거리가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나는 추상주의에 속하는 화가가 아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 아이러니, 관능성,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

마크 로스코(1903~1970)가 남긴 말이라고 한다.    

  


마크로스코는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열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평생을 보냈는데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인간의 근원적 감정, 환희, 비극, 절망 등을 화폭에 담았다. 대부분 수평 구도의 화면에 단순하지만 다양한 색채로 깊이감을 표현한다. 초기 작품은 빨강, 노랑 등 밝고 화려한 색상이 주를 이뤘으나 1950년 중반부터는 검붉은 색이나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 어두워지는 색조를 사용하였고 자살 전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은 온통 붉은색의 ‘무제’였다.       

그의 그림은 관객들로 하여금 억눌린 무의식을 자극받아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고 간츠펠트 현상(공간감각을 상실하고 이상 감각을 경험하는 현상)을 체험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색채로만 표현된 단순한 사각형 그림이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을 던진다.  그의 사각형 앞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거대한 벽, 들어갈 수 없는, 관통할 수 없는 색채의 벽 앞에서 비로소 자신을 본다.     


“붉은색은 미술의 기본이 되는 색이면서 삶과 죽음, 열정 같은 원초적 감정을 표현한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언젠가 블랙이 레드를 삼켜 버릴 거라는 거야.”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 어떤 것도 놓아서는 안된다. 내 작품에 어떤 설명도 달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보는 이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침묵하는 일이다."


마크 로스코, 색채 사각형의 주술사...    

그는 붉은색을 사랑했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그의 동맥을 타고 뿜어져 나온 레드였다.

결국 블랙이 그의 레드를 삼켜버렸다.  그가 두려워하던 대로... 어김없이.    


2022년이 지고 있다. 한 해의 끝. 여전히 나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시간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서있다. 

이제 어떤 풍경을 지나왔느냐보다 어떤 풍경을 보게 되느냐가 중요한 시기다.

그의 그림 속으로....  부유하는 사각형안으로 들어간다.

올 한 해 나의 벽과 나의 담이 되어줄 그의 그림 안으로, 내면을 들여다볼 거울 같은 그의 그림 안으로 걸어가야겠다.  묻고 답하고... 설령 질문의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내 안의 레드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깊고 짙은 레드와 깊고 짙은 침묵 속에서..... 2023을 기다린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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