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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

17년 만의 폭설, 겨울의 새하얀 속내를 겨울의 창백한 얼굴을 확인한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다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란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 문학동네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우리는 허공이란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오늘 진종일 내리는 눈은 형식을 갖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허락된 허공에 무형식의 눈이 쏟아져 내린다.

관현악단의 연주처럼 일시에 한 방향으로 쏠리는 듯하다가 다시 정직한 수직으로, 또다시 허락된 격정을 품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눈이..... 눈이라는 것이.   

만지면 금시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깃털 같은 것이.

아래로 아래로 지층처럼 퇴적되면 단단한 암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눈의 암석...

     

유일하게 허락된 날. 눈이 내리기로 작정한 날 같다.

이른 새벽 불을 켜지 않아도 온통 새하얀 하늘. 눈부시게 밝았다.

눈(目)처럼 밝은 눈(雪)이 잠을 깨웠다. 쉼 없이 창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서...


<새로운 시간의 시작>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늘 똑같던 공간이

다른 움직임으로 붐비기 시작하면서

이색적인 선(線)들과 색깔을 그으면서, 마침내

아직까지 없었던 시간

새로운 시간의 시작을 열고 있다!     


그래 나는 찬탄하느니

저 바깥의 움직임 없이 어떻게

그걸 바라보는 일 없이 어떻게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있겠느냐.

그렇다면 바라건대 나는 마음먹는 대로

모오든 그런 바깥이 되어 있으리니……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

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도로인지, 인도인지, 아파트 화단인지, 계단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날.

눈사람을 만드는 이도 눈썰매를 타는 이도 하나 없다. 어떤 유희를 즐기기엔 쏟아지는 것들이 도리어 공포스러운 날........ 눈의 마음대로, 눈의 뜻대로, 눈의 의도대로.....   눈은 도시를 점유했다.  

비어있던 하늘이 새하얀 것들로 가득 찬다

새로운 시작의 시간, 채움의 시간.... 모오든 바깥이 안이되는 시간. 바깥을 안으로 끌어안는 시간... 바깥을 굴려 안으로 만드는 시간. 새로운 시간. 경계가 없는,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시간.               


베르나르 포콩/ 겨울의 방

" 사랑, 그것은 한 얼굴의 현실성을 너무도 강렬하게 확인하는 것이다. " / 마음산책 <베르나르 포콩 사진집>


창문을 뚫고 푸른 겨울이 들어와 있다. 어디가 안쪽인지 어디가 바깥쪽인지 모호하다.

바라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창문으로 들어온 겨울은 달라진다.

창을 통해 겨울의 현실성을 확인한다. 겨울의 창백한 얼굴과 겨울의 강렬함과 겨울의 감추지 못하는 새하얀 속내를....... 기어이 드러내고 마는 마음들을........

당신은 내게 늘 첫눈입니까?

겨울이 묻고 있는 아침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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