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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겨울비 내리고

여전히 낡고 녹슨 것을 사랑하는 나는..........

< 가을비 >     

                                         도종환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사랑하고

오늘 낙엽 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가 가겠지요.          


도종환 시인의 가을비는 비 오는 날이면 늘 떠오르는 시다.

봄비든 여름비든 가을비든 겨울비든........     

“어제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자리에

오늘 가을비가 내립니다"

가을비 자리엔 봄비, 여름비, 겨울비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제 우리는 사랑하고 오늘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내일은 바람이 불 것이고 또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갈 것이라는 시인의 말이 와닿는 아침이다.   

비가 내린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비... 

아파트에 살면서 비가 지붕으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옥탑이 있는 곳으로 옮기고 나서는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베란다 마른 장미들이 안타까워 애써 물을 주었는데 어제 오후부터 비가 내렸다. 

밤새 비바람에 나뭇잎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난번 내린 눈, 아직 도로 곳곳에 쌓여있던 눈이 비에 젖는다. 녹아간다.

도로 위로 흐르는 것들. 겨울의 눈물 같은 것인가.


도종환 시인의 또 다른 시 ‘겨울비’가 있다.

이 시는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스산하면서도 아름다운 <가을비>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그의 시 <겨울비>.     

겨울비

                                              도종환          


아침부터 겨울비 내리고 바람 스산한 날이었다

술자리에 안경을 놓고 가셨던 선생님이

안경을 찾으러 나오셨다가

생태찌개 잘하는 곳으로 가자고 하셨다

선생님은 색 바랜 연두색 양산을 들고 계셨고

내 우산은 손잡이가 녹슬어 잘 펴지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툭하면 끌려가 얻어맞기도 했지만

그땐 이렇게 찢기고 갈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가장 큰 목소릴 내던 이가

제일 먼저 배신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고

철창 안에서도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니라

담요에 엉긴 핏자국보다 끈끈한 어떤 게 있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겁이 많은 선생님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보다 중도가 좋다고 하시면서

안경을 안 쓰면 자꾸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

낮부터 '처음처럼'만 두병 세병 비우셨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손에 잡히는 것마다 낡고 녹슨 게 많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옛날이 좋았다고 하셨다 "    

“왼쪽에서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는 왼쪽에 있다고 몰아붙이는 세월이

다시 오고 추적추적 겨울비는 내리는데

선생님 옛날이야기를 머리만 남은 생태도

우리도 입을 벌리고 웃으며 듣고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옛날은 없는데..

주말에는 눈까지 내려온 나라 얼어붙는다고 하는데."

 

    

낡고 녹슨 것....... 무언가를 버리지 못하는 나. 해지 난 달력도, 용도를 상실한 지난해 다이어리도 띄엄띄엄 쓰다 말다 버리기도 다시 쓰기도 애매한 노트들도...

낡고 녹슬었지만 그 안에 내가 있다. 어느 보잘것없는 한 줄의 문장 속에 나의 시간들이 있다.

왼쪽에서 보면 가운데 있는 이를 오른쪽에서 보고 왼쪽이라고 몰아붙이는 잔인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섬뜩하고 야만적인 기사들이 넘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을 계속한다.

생태탕 속의 머리만 남은 생태처럼. 남의 이야기인양 입을 벌리며 웃으며 듣고 있다.

무엇이든 불리한 것은 ‘나’만 아니면 된다는 비겁함 같은 것이 단단하게 마음 어딘가 자리 잡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대수롭지 않게......

머리 복잡하지 않게 무심하게 무표정하게 무미건조하게.....

자판을 두드리면 그만이다.


오늘 비 오는데.

어제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비 내리고 내일 그 자리엔 바람만이 불 것인데.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 세상을 살다가 갈 것이다.     

오늘 비 오는 데

여전히 낡고 녹슨 것을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띄엄띄엄 쓰다만 샛노란 옥스퍼드 노트를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마티스의 푸른 누드와 리디아를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모래시계를 뒤집는 단순하고 지루한 유희를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유리잔에 가득 담긴 검은 피 같은 쓴 케냐 AA를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박제가 된 노란 장미와 빛바랜 빨간 장미를 사랑하는 나는

여전히 세상의 책을 읽고 또 읽고  

여전히 보잘것없는 문장 하나를 덧붙이고 마는 나는.......

여전히 무심하게 깜박이는 커서의 움직임을 쫓고 있다.

여전히 비겁하게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P303 

인정해야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일들과 인정하고 싶었지만 인정해서는 안 되는 일들 사이에서 늘 흔들렸다.  익숙한 곳으로부터 자신을 추방하지 않고서는 어떤 전진도, 변화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만 껍질을 벗어던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낯섦을 받아들이는 일, 물컵이 있는 우산을 접어버리는 일, 온몸으로 비를 맞는 일, 

그리하여 어떠한 나도 인정하지 않는 동시에

 어떠한 나도 인정하는 일. 


제4부 존재의 변주곡 : 

무엇으로부터의 추방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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