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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춤을 추는 시간...

저마다의 삶은 위태로운 그러나 아름다운 춤이다.

인생의 춤을 추는 시간..     

 <인생의 춤>(The Dance of Life)     

뭉크 <인생의 춤>은 뭉크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99년 여름에 그려 1900년에 완성했다. 배경은 노르웨이 오스고스트란드 해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과 하얀  옷을 입은 여인들, 가장 시선을 붙잡는 것은 앞부분에 있는 세 여인이다.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한가운데에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오른쪽에는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이는 검은 옷의 여인이 서 있다.

작품의 제목이 <인생의 춤> 이듯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뭉크는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뭉크는 ‘인생의 춤’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나는 첫사랑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기억 속 그녀는 미소 짓는 금발 여성이다. 그녀는 사랑의 꽃을 꺾으려 하지만 꽃은 꺾이지 않는다. 반대편에는 검은 옷을 입은 그녀가 슬픈 얼굴로 춤추는 커플을 바라보고 있다. 내가 그녀와의 춤을 거절당했던 것처럼, 그녀 역시 거절당한 채.”     

뭉크와 춤추는 붉은 옷의 여인은 1885년 여름에 만난 밀리 타로우로 두 살 연상인 유부녀였다. 1885년 겨울에 먼저 관계를 끝낸 것도 밀리였다. 

흰옷과 검은 옷의 여인은 비슷한 얼굴로 그려져 있는데 그림을 그릴 당시 뭉크와 교제 중이던 툴라 라르센이라고 한다. 1898년 겨울, 오슬로에서 부유한 포도주 상인의 딸인 4살 연상의 툴라를 만났고 1899년에 베를린, 이탈리아, 파리 여행을 하였다. 여행이 끝나고 뭉크와 툴라의 관계를 끝났다. 이후 툴라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뭉크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 ‘인생의 춤’ 그리기에 매진하였다. 


뭉크의 작품에는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독, 슬픔. 절망과 절규, 불안, 분노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된 작품. 인생의 답을 알 수 없기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더듬어간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평생 고독했고, 병마에 시달렸던 탓이었을까?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에 대해 더 날카롭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뭉크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얀 드레스와 붉은 드레스, 검은 드레스의 여인들이 누구인지 사실 명확하지 않다. 붉은 옷의 여인이 첫사랑인지, 현재의 사랑인지 알 수 없다. 흰 옷의 여인과 검은 옷의 여인이 같은 인물인지도 모호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림 속 남자는 뭉크 자신이 분명하다. 뭉크는 하얀 드레스의 여인을 떠나 붉은 드레스를 입은 긴 머리 여인과 열정적인 춤을 추고 있다. 그 춤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붉은 옷의 여인과 춤을 끝내기만을 기다리는  검은 옷의 여인이 있다.   

하얀 옷,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의 표정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뭉크의 작품 < 인생의 춤 >을 인생에 빗대어 하얀 옷의 여인을 과거, 열정적인 춤을 추는 빨간 옷의 여인을 현재, 검은 옷의 여인을 미래로 해석하기도 한다. 뭉크는 하얀 옷의 여인을 떠나 한 중앙에서 붉은 옷의 여인과 춤을 추고 있다.  그 뒤로  춤에 몰입한 여러 커플들이 보인다. 그들은 모두 하얀 옷의 여인과 춤을 춘다. 그리 생각하면 하얀 옷이 인생에 있어서 ‘과거’를  뜻한다는 말은 모호해진다. 뭉크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과거와 춤을 춘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어떤 그림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인생의 춤을 추는 사람들. 저마다의 무대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혹은 모두의 관심을 잡아끄는 춤을  추고 있다. 

 


인생을 흔히 여행에 비유한다. 자유여행일 수도 있고 패키지여행일 수도 있다. 가끔 나는 인생은 패키지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유여행이 주는 불안감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 패키지 속에 펼쳐질 여정은 안정적일 거라는 계산을 했을 테니까.

그럴듯해 보이던 패키지를 선택하고 인생의 춤을 추고 있다.

때론 원치 않았던 것들이 뒤섞여있다 해도 인생이란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젊은 날. 인생이란 가능성의 문 같은 것이어서 손을 내밀기만 해도 문이 저절로 열릴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저절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내가 선택한 인생의 패키지가 좋은 결말이 될 수 있도록 끝없이 인생의 춤을 추고 있다.     

목적 없는 여행도 있을 수 있으나 여행의 목적은 결국은 돌아오기 위함이다.

여행의 시작은 떠나기 전의 설렘에서부터이고 여행의 끝은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는 것.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인생의 춤이 끝나면 누구든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류는 얼어붙은 호수 위를 살아가는 일단의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이 호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금씩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으며 머지않은 언젠가 마지막 얼음층마저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호수에 빠져 죽어가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운명인 셈이다.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즐거워할수록, 낮에 해가 더욱 환하게 반짝일수록, 밤에 모닥불이 더욱 불그스름하게 타오를수록 전체 상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더욱 가슴 저미는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 윌리엄 제임스의 우화 중에서 -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녹아내리는 얼음 위에서 우리는 스케이트를 타로 모닥불을 피우고... 즐거워한다. 춤을 추며....... 

인생이란 여행 패키지 상품 속 현재의 나로 살아갈 뿐이다.

하얀 드레스도 검은 드레스도 아닌 오직 빨강 옷의 여인인 체로.. 후회 없이........그렇게.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우리가 춤을 출 때 그것은 기도의 일부이다. 

춤을 추고 있지만 동시에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기도의 일부이다. 영혼, 육체, 마음이 늘 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기만의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것.

저마다의 삶은 위태로운 그러나 아름다운 춤이다.

(제1부 : 존재의 의미 찾기/ 춤을 출 때 그것은 기도의 일부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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