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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삶은 늘 경쟁의 전쟁터였지만....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잃지 말아야.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1년 석판화  카테콜 비츠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는 근대 독일의 역사 속 고통에 찬 민중의 몸짓을 기록한 화가다. 


석판화 ‘씨앗을 분쇄하지 말라(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1942년


"인생에는 유쾌한 면도 있는데 왜 당신은 비참한 것만을 그리는가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정확한 답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은 명확히 말해 두고 싶다. 나는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에 동정을 하거나 공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서 단순 명쾌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녀의 삶은 궁핍하지 않았고 유복했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작품들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아픔, 삶에 억눌린 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들과 손자의 죽음 때문일 수도 있다.  케테 콜비츠는 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전쟁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광기의 변주일 뿐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누군가 가장 높은 곳에서 버튼을 만지작 거릴 때 씨앗들은 짓이겨진다.

들판에서 자신의 집에서 계곡에서... 전선에서.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구겨지고 짓이겨지고 흩트러지는 것은 순간이라는 것을..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페터는 절구로 빻아서는 안 될, 씨앗으로 쓰일 열매였다. 그는 뿌려질 씨앗이었다. 나는 씨앗 한 알, 한 알을 뿌리는 사람이며 재배자이다. 한스(차남)는 어떤가. 그는 미래를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씨앗을 뿌리는 사람으로서 성실히 봉사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한 이래 나는 다시 명랑해져서 냉정을 되찾고 견실해졌다." -                                                                                                    1915년 2월 15일 일기에서          

석판화의 작품명을 알기 전에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왔는데 작품 제목은 더 강렬하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품에 감싸 안은 여인, 나이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품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팔을 벌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여인은 이미 세상의 야만을 알고 있는 표정이다. 쉽게 짓이겨진다는 것을, 의도와는 무관하게 분쇄되고 아무렇지 않게 버려진다는 것을.     

여인의 팔은 가냘프지 않다. 여인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두 아이와는 달리 다른 한 아이는 세상에 대해 무지한 시선이다.         


총을 겨누는 전선만이 전쟁터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씨앗들, 미래의 씨앗들이 자라고 있는 교육의 터전에 경제 논리를 들이대며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움직임들. 교육 현장이 전쟁터가 되고 있다.  

아이들의 생각을 여는 수업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변해가는 것인지 아이들이 변해가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생각들을 여는 것이 쉽지 않다. '생각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낯선 것들과 낯선 것들을 연결해가며 지식의 퍼즐을 맞춰보며 그 안에서 ‘유레카’를 외치는 수업을 바라지만 어렵다는 것을 늘 실감한다.

'생각을 가르쳐드립니다'. 혹은 '생각을 암기해 드립니다' '창의력을 외우세요'...

그런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시대다.     


오랫동안 이화여대에서 문학강의를 했던 이어령 교수가 수능에 출제되는 문학작품들 특히 시를 보면 모든 것이 다 맞는 말 같은데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라는 문제가 젤 어렵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귀신같이 적절한 답과 적절하지 않은 답을 잘도 찾아내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니...

사실 그렇다 대부분 출제 문제의 질문은 '가장 적절한 것은?' 혹은 '적절하지 않은 것은?'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질문 자체가 모호하다는 생각을 늘 한다.

무엇이, 어떤 기준으로 적절하다는 것인지......


같은 작품을 읽고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해도 생각들의 진전이 없다.

어쩌다 기발한 생각은 대부분 어설픈 유튜브에서 얻어낸 것들이다.

수업이 끝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묻는 질문에 답은 대부분 영수학원을 가거나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는 것이다.     

삶에서 경쟁이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러 경쟁을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새해가 시작되었고. 일주일이 지났다. 예비중과 예비고등에게는 압력이 거세지는 시기다

놀지 못하는 아이들. 방학은 학문(공부)을 잠시 내려놓으라는 말인데 다시 학교로 간다. 학교 방학프로그램을 듣기 위해.  그리고 공부방을 가고 학원을 가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으며 방학 중에만 개설된다는 영 수 특강을 듣느라 더 바쁘게 움직인다.     

삶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일까. 가파르게 끌고 나가는 선행학습은 더 나은 기회를 보장할까? 말 그대로 인생을 모든 것으로부터 선행시켜주는 것일까?     

전쟁터가 된 교육에 아이들의 해방구는 스마트폰이고 더 한걸음 나가면 소위 일탈이라고 할 만한 범주의 유혹이다. 단순 호기심을 벗어나는 수준. 유혹의 역치는 갈수록 높아지고  아이들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 유혹의 덫을 만든이들은 결국 어른들이 아닌가. 더 나아가면 사회가.... 현실이... 상황이.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려다 교육현장의 이야기로 흘러나갔다.

씨앗들이다.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절구로 빻아서는 안 될, 씨앗으로 쓰일 열매였다. 그는 뿌려질 씨앗이었다"

뿌려질 씨앗이었다. 짓이겨져서는 안 되는........ 

그러나 펜과 종이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의 뇌를 가두는 현실이 서글픈 것이다. 

인생의 더 나은 기회를 얻기 위함이라는 원대한 명분아래  자꾸만 짓이겨지는 아이들의 현실이 아픈 것이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학창 시절 자신을 관통하는 책이 최소한 한 권은 있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한다.

어떤 시기, 어떤 상황에 있었느냐에 따라

나를 관통한 책은 약간씩 달랐지만

청소년기 나를 관통했던 책은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이었다.

그 유명한 문구 아브락사스에 대한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 어렵다는 헤세의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다.

다른 무엇이 아닌..... 누구의 무엇이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

그 모든 것들은 자기 안에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나는 그 한 줄의 문장을 읽으며 전율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요즘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생을 관통할 한 권의 책이 있을까를 생각한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삶. 흔들려서 나쁜 게 아니다.

  다만 흔들리더라도 중심이 있어야 하기에.... 

"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중에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찾아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바로 그것이 나로 사는 길이기에.  쉴 새없이 흔들리지만 흔들림에도 중심이 있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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