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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20대의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가슴에 품고 미친 듯 달렸다는 일화를 기억한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 주는 문학적 충격 탓이었을까. 아주 오래전 나도 20대의 젊은 날 카뮈의 『이방인』을 가슴에 품고 미친 듯 달렸다. 카뮈를 흉내 내고픈 치기 어린 행동이었으리라.

담배를 입에 물고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자. 마치 이방인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가 알베르 까뮈였다. 젊음의 시간... 나는 누구에게나 죽음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그의 책 『이방인』의 첫 문장에 압도되었다. 일종의 시니컬한 광기 같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알제에서 80km 떨어진 마랭고의 양로원까지 버스를 놓치지 않으러 달려간다. 휴가를 청하며 사장의 달갑지 않은 표정에 “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는 소리를 하고서.   

 

"입관을 했습니다만 보실 수 있도록 나사못을 뽑아드리지요."

관으로 가까이 가려는 그를 나는 제지했다

“안 보시렵니까?”

“네”

“왜죠?”

“모르겠습니다.”     


양로원 문지기는 졸음에 겨운 그에게 밀크커피를 권하고 그는 문지기에게 담배를 권한다.

엄마의 시신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을지 망설여졌지만 그는 담배를 피운다.     

양로원의 친구분들이 죽은 지기를 위해 밤샘을 하러 모인다. 관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뫼르소를 관찰한다. 뫼르소는 그들이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그곳에 앉아있는 것 같은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받는다. 침묵과 규칙적인 울음과... 견디기 힘든 피로감과 졸음. 


페레스라는 노인이 장례행렬에 따라나선다. 영구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페레스는 뒤처지기 시작했고  그는 길을 벗어나 벌판을 가로질러서 다시 나타나곤 했다.

뫼르소는 한결같이 햇빛이 넘쳐서 눈부시게 빛나는 벌판이 보일뿐,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햇빛, 가죽냄새, 영구차의 말똥냄새, 니스 칠 냄새, 잠을 자지 못한 피로, 묘지 무덤들 위의 붉은 제라늄꽃들, 페레스의 기절, 엄마의 관 위로 굴러떨어지던 핏빛 같은 흙, 그 속에 섞이던 나무뿌리의 허연 살, 목소리들을 떠나 마침내 알제의 빛의 둥지로 돌아왔을 때 실컷 잠을 잘 수 있으리라는 기쁨. 

    


휴가를 신청한 뫼르소는 예전 직장 동료였던 마리를 수영장에서 만나 함께 수영을 하고 희극영화를 보고 사랑을 나눈다. 뫼르소의 일상은 늘 비슷비슷하다. 개를 잃어버린 이웃주민인 살라마노를 위로해 주고, 우연히 자신을 창고업자라고 소개하는 포주 레몽의 집에 초대받아 정부(情婦) 복수와 관련해 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하고 경찰에 가서 레몽의 폭행을 두둔하는 증언 해주면서 레몽에게 호감을 얻는다.

정부(情婦) 폭행과 관련하여 레몽은 정부의 오빠를 포함 아랍인들의 미행을 받는다. 레몽은 뫼르소와 마리를 친구 마송의 별장에 초대하고 알제 교외의 해변에서 마리와 뫼르소는 지치도록 수영을 한다. 햇빛이 거의 수직으로 쏟아져내리고  바다 위에 반짝이는 그 섬광을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바닷가 저끝 아주 멀리서 푸른 작업복을 입은 아랍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랍인들과 레몽, 마송의 싸움이 벌어지는데 레몽은 팔을 단도에 찔려 응급처치를 받으러 간다. 태양은 찍어 누르는 듯 강렬하게 쏟아지고 레몽은 적개심에 불타 권총을 들고 별장을 나선다.

뫼르소는 엉거주춤 그의 뒤를 따라가고 마침내 커다란 바위 뒤 모래밭으로 흐르는 조그만 샘가에 도착한다.  아랍인 한 명이 작은 갈대 피리를 끊임없이 불고 있었다. 태양과 침묵, 졸졸 흐르는 샘물 소리와, 세 가지 음정의 피리 소리만이 들려왔다.

권총을 움켜쥐는 레몽을 뫼르소는 사나이답지 않다고 제지하고 그 사이 아랍인들은 뒤걸음질하듯 바위 뒤로 사라져 버렸다. 마송의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가 계단을 올라가려던 뫼르소는  하늘에서 쏟아붓는 햇볕의 비를 견딜 수 없었다. 다시 바닷가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태양과 태양이 쏟아내는 영문 모를 취기, 모래, 흰 조개껍질, 유리 조각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칼날처럼 번쩍였다.   


그늘 밑의 휴식을 되찾고 싶어 걸어간 장소에 래몽을 찌른 남자가 다시 돌아와 누워있었다.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었기에 나는 그 생각은 하지도 않은 채 그리로 갔던 것이다.  내가 돌아서기만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 한 걸음을 옮겨본들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빛에 비추며 나를 겨누었다. 빛이 반사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고 이마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렸다.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뻗어 나온 빛의  칼날은 아픈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온 하늘이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힘 있게 권총을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 P70 )     


1부는 마랭고의 양로원에서 돌아가신 엄마의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뫼르소가 아랍인들을 살해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가 그의 인생을  불행으로 끌고 들어간다.     

2부는 뫼르소의 살인을 우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변호사와 계획살인이라고 주장하는 검사. 뫼르소에게 하나님을 믿게 해주고 싶은 사제, 예심판사, 배심원들이 등장하여 뫼르소의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다.           


뫼르소는 체포돼 심문을 받고 예심판사는 죄를 후회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믿지 않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엄마의 장례와 관련하여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를 옹호하는 입장인 변호사를 난처하게 만든다. 또한 뫼르소는 모든 것이 우연한 일이었고, 살인의 동기는 햇빛이었다고 하며 뉘우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 이 작품에는 ‘태양’이 자주 등장한다. 정오가 지난 바닷가의 태양은 어머니의 장례식 때처럼 사물을 액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만들고 모든 물질을  쇠붙이로 변화시킨다. 바다는 칼이 되고 모래는 강철이 되고 그가 당긴 권총의 방아쇠는 살인의 원인이 된다.      


재판 과정에서 뫼르소의 모든 행위는 예심판사, 검사 등과 같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는 배심원들에 의해 하나씩 검토된다. 그들은 행위 사이에서 의도적인 연결 고리를 발견해 사악한 본능이 그를 살인으로까지 이끌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재판에 선 그는 기사거리를 찾는 기자들의 집중을 받고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는 충동적인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양로원 사람들이 증언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보인 태도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율법을 무시하고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보일 줄 모르는 영혼 없는 사람임을 주장하는 검사에 의해 정의라는 명분하에 고의적인 살인으로 사형을 언도받는다. 

한 마디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랍인을 살해한 죄로 사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다는 사실로 사형에 처해지는 셈이다. 아랍인 살해를 이유로 그의 삶 전체가 법정에 선 것이다. 


죽음을 놓고 보면 1부의 자연사 (노화로 인한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살인, 2부에서는 사형언도라는 사회적 타살이 주된 내용이다.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죽음에 대한 명분과 이유,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뫼르소와 살인을 저지른 후의 뫼르소는 같은 인간이다. 그러함에도 사형언도를 염두에 두고 뫼르소를 관찰하면 살인 이전의 모든 행위까지도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심하고 냉혹한 인간성의 소유자임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법정에서도 뫼르소는 이방인이 된다. 그를 앞에 두고 그가 말할 기회를 박탈한 체 변호사와 검사와 증인들과 판사가 말을 이어간다. 그의 일상은 법정에서 낱낱이 폭로되고 아주 사소한 조각들조차도 살인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명백하고 당연한 퍼즐이 된다.           


세 번이나 만남을 거절했던 형무소 부속 사제가 그를 찾아와 모든 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고 있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요구하기에 뫼르소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사제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확신, 즉 죽음에 대한 확신을 토로한다.


보기에는 내가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있다.”     


그는 고뇌를 씻고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가 느꼈을 해방감과 다시 살아볼 마음을 확신하며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고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은 그렇게도 그를 닮아 마침내 형제 같아서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했다고 느끼면서 사형 집행의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와 함성으로 그를 맞아주기를 마지막으로 소원한다.     


“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날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아무 차이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이란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유다인이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대비되는 입장에 있는 이민족이나 이교도들을 가리킬 때 쓰이고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적, 종교적 가치로부터 배제된 존재를 칭한다. 카뮈의 『이방인』에 등장하는 성서적 의미의 이방인은 뫼르소가 살해한 아랍인들이지만, 작품 속 ‘이방인’은 결국 뫼르소 자신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보이는 대로, 사실대로 표현하는 그는 배제된 존재, 무관심한 존재로 타인에게 인식된다. 사랑에 대해서도 승진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도 자신 목숨이 결정될 재판에 대해서도 마침내 사형날짜를 기다리는 사형수의 입장에서도 시종일관 이방인의 자세다.

항소가 기각되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게다가 서른 살에 죽든 일흔에 죽든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죽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오직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이 있다. 다른 사람들도 언젠가 죽음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도 죽음을 선고받을 것이다. 살인죄로 기소된 자가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다고 한들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도 살라마노의 아내만큼이나 가치가 있다. ”     


흔히 카뮈를 가리켜 ‘부조리의 철학자’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원하는(원할 수밖에 없는)것과 우리가 세계로부터 얻는(얻기를 바랄 수 있는 것)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상황을 부조리 (absurd)라고 부른다. 카뮈는 “인간은 비합리화와 얼굴을 맞대고 서 있으며 인간은 자기 내면에 행복과 이유를  향한 열망이 차 있음을 느낀다. 이처럼 부조리는 인간의 욕구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이 대립하는 데서 비롯된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그의 작품 속 뫼르소를 통해 부조리의 감정이나 감각에 빠져 절망이나 자살에 이르는 허무주의를 긍정하는 대신 인간과 세계, 의식과 현실의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반항적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부조리 인간(l'homme absurde)'은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 즉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카뮈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본다

뒤집어보면 "삶에 대한 사랑 없이는 삶에 대한 절망도 없다."   더 명확하게 뒤집어보면

"삶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삶에 대한 절망도   받아들여야 한다."로 생각된다.


부조리, 실존, 각성, 사회적 타살과 무관심, 태양의 광기, 죽음..... 이방인....

어렵고 무거운 주제다. 20대의 나는 아마도 이 책을 읽음으로써 또 다른 하나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실존. 깨어있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는 부조리한 인간.... 그것이 그토록 강렬하게 내 심장을 강타했으리라..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읽는 이방인은 뫼르소가 사형집행을 앞두고 독방에서 독백하는 장면들에 자꾸 생각이 멈춘다. 확신.... 내게는 확신이 있다고 외치는 절규.

사형은 대개 새벽에 이루어지기에... 뫼르소는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를 기다린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새벽은 그에게 삶의 하루를 더 연장해 준다.. 죄수용  쇠밥그릇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낯설어한다. 웃지 않는 얼굴의 사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추위가 몰려왔다. 햇살... 강철 같은 비수 같은 햇살은 아니다. 단지 3월의 햇살만이 무심하게 내리쬔다. 우리들의 생 위로.../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아르로 문학 나눔 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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