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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일은 영원히 지속되는 광란의 축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슈테판 볼만

책을 읽는 일은 영원히 지속되는 광란의 축제     

“ 현 존재를 견디는 유일한 방식은 영원히 지속되는 광란의 축제처럼 문학에 열광하는 것이다.”

                                                                                     1858년 플로베르의 편지에서   


 책을 읽는 자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깊이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은 대열에서 벗어나고

대열에서 벗어나는 자는 적이 됩니다.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슈테판 볼만


“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여자들에게 주어지기까지는 수백 년의 세월이 걸렸다. 책을 통해,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상상력과 지식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되는 순간. 책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게 된 순간 여자들은 달라졌다. 가정에 대한 순종을 벗어던지고 독립적 자존심을 얻었기에 그녀들은 위험한 존재가 되었고 현실과 꿈속을 오가는 그녀들의 시선은 예술가를 유혹하는 은밀한 위험이 되었다.”     


책 읽는 여자는 두 가지 이유로 위험하다.

 책은 가슴에 장전된 불씨에 불을 지피는 수단이기에 책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는데 그 위험한 물건 ‘책’이 여자의 손에 있을 때 세상의 질서는 위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여자의 역할은 가정의 질서 유지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여자의 손에 뜨개질 도구나 호미가 아닌 책이 들려있다는 것은 위험을 불러오는 불경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둘째로 책을 읽는 여자가 위험한 이유는 그녀 스스로 남성 중심의 세계로부터 배척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단지 진리와 학문을 숭상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여자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언급된 진리와 결혼한 여자 히파티아다.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          

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려라        

                                         - 히파티아-     


히파티아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히파티아의 어머니는 히파티아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테온은 혼자서 히파티아를 길렀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는데 사물을 관찰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도 기르도록 교육받았다.  폭넓은 지식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왕과 철학자들로부터 수차례 결혼 제의를 받았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라고 대답하며 구혼 제의를 거절하였다. 한편 “철학자에게”라고 주소가 쓰인 편지는 의례히 그녀에게 배달되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쳤으나 그녀가 추구한 과학적 이성주의에 반감을 가진 기득권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 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다.     

-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려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 -       

<히파티아는 37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뭇 남성의 구혼을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이 막강한 세력들의 진앙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루스는 그녀를 혐오하였는데  그녀가 로마 총독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혐오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히파티아가 이교도의 과학과 학문이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이교도의  사상이라고 폄훼하였으니 키릴루스의 혐오에는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자신에게 밀려 닥치는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가르치고 글로 발표했다. 415년 자신의 일터로 가다가 광신 폭도들에게 붙잡히는데 그들은 전복껍데기로 만든 무기로 그녀의 살을 뼈에서 발라낸 다음  남은 시신과 그녀의 저술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잊혔다. 키릴루스는 나중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p 666~667 인용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독서의 역사에서 여자는 종이에 적힌 단어의 그물 속으로 날아들어온 작은 파리에 불과했다. 그것은 구경꾼이얶다.” 두브라스카 우그레시치는 그녀의 책 <독서의 금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에만 그랬다고? 지금도 여자는 구경꾼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의 그물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열광을 하면서, 뚜렷한 이성을 지닌 채로, 언어에 대한 열정에 굶주려서, 

우리 옆에는 지루해하는 남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밀치며 말을 해주어야만 한다.

“ 이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읽어봐요”

사랑, 공포, 늙음, 죽음... 언어의 그물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 기꺼이 그 그물에 걸려든다.

그래서일까. 종교 재판의 장작더미 위에서는 주로 여자와 책이 불살라졌다. 그것에 비교하면 희생된 남자의 비율은 적은 편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무엇인가를 아는 여자 그리고 그 같은 지식을 담은 책, 그들은 위험하다.

“그것을 내다 버려!” 남자로 이루어진 정치가, 독재자, 지배자, 경찰, 관리들 중에는  쓰인 단어를 종종 경멸하는 이들이 있다. 여자는 수프에 넣을 야채다발과 생선을 시가 적힌 종이에 둘둘 쌀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진시황 치하에서 책을 불태운 것과 비교하다면 그 정도야 뭐 대수로운 일인가?”하고 두브라스카 우그레시치는 묻는다.

(....)     

남자는 여자에게서 지나치게 핵심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18세기에는 여전히 많은 소설의 표지에 실과 바늘이 끼워져 있었다. 여자에게 그녀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여자의 본분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독서는 시간 낭비이자, 돈 낭비다. 그리고 독서가 여자들을 어떤 곳으로 -자신의 생각, 반항, 성적인 환상, 그 밖의 다른 것으로-데려갈지 누가 알겠는가?

“여자가 읽는 것을 배웠을 때, 여자의 문제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마리 폰 에브너 에센바흐의 말이다. 책을 읽는 여자는 근거를 묻고, 그리고 근거를 묻는 것은 단단하게 맞물린 세상의 규칙을 파괴한다.     


독서에서 자신감이 자라나고, 자신감에서 자신의 생각에 대한 용기가 자라난다. 남자는 생각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고트프리트벤은 한 편지에서 말한다.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두뇌가 아니라, 전혀 다른 곳이 자극받기를 원한다." 우리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다. 나이가 들수록 여자에겐 때때로 책이 남자보다 더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이 감동받기를 원한다.     

   

여자는 책을 읽는 남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남자는 책 읽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 중에서 발췌     

                                                                    - 엘케 하이덴라이히 ( Elke Heidenrich)      


“ 왜 사람들이 책을 중요하고 두려운 것으로 간주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요? 책은 땀구멍이 있는 삶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죠 하지만 고루하고 편협한 시민들은 땀구멍도, 머리카락도, 표정도 없는 밀랍인형 같은 얼굴을 원해요.”

“ 옆집에 있는 책은 장전된 총과 같네. 그것을 없애게. 총탄을 빼내고, 인간의 정신을 깨부수게.”          

 『화씨 451도』 레이 브래드버리     


피터 얀센스 엘링가의 작품 < 책 읽는 여인 1668년 1670년)   

그림의 세부 사항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화가가 이 하녀의 독서 태도가 경솔하며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일이 담긴 쟁반은 벽 쪽에 바짝 붙어 있는 의자의 불룩 속은 부분에 아무렇게나 성급하게 넣여져 언제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또  좀 더 많은 햇빛을 받기 위해 위쪽에 난 세 개의 창 가까이로 옮겨 놓은 의자에 깔려했던 방석은 부주의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다.

여주인의 것처럼 보이는 실내화도 정돈되지 않은 채 바닥애 뒹군다.

여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노동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가능한 한 빨리 독서를 하려는 하녀의 모습은 독서에 대한 열렬한 욕구를 보여준다. 

( P 31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중에서)    

 

슈테판 볼만의 해석이 옳은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책을 읽는 여인이 매우 급하고 초조하게 책을 읽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두건을 두른 여인. 잘 차려입지 않은 여인. 아마도 하녀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여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감히(?) 위험하게도 책을 손에 집는다.

우리가 여기서 인식할 것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남자들이 여자들이 책을 읽는 것을 위험 천만한 것으로 보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여주인도 하녀가 책을 읽는 행위는 질서를 전복시킬 위험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 여인은 아마도 변할 것이다. 자기 내부의 강력한 불꽃이 책을 통해 점화되는 순간. 두건을 벗어던지고 앞치마를 벗어두고 더 넓은 세상의 바다로 달려갈 것이다.     

여자들은 책을 통해서 진리를 마주하고 내밀한 즐거움 안으로 파고들어 가며 세상으로부터 짧은 도피를 통해 내면의 자아를 흔들어 깨운다. 비단 여자들만이 그러할까? 당연히 책을 읽는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작품 < 책 읽는 여인 1770년> 

잘 차려입은 조각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찻잔을 들고 있는 것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책을 보고 있다.

이 그림은 내 유년 시절, 햇살이 들던 동명동 집 마루의 끝. 높은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다. 

아마도 내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미치도록 사랑하게 된 것은 유년시절 내내 마주한 이 그림의 영향 탓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물려운 문화적 유전자 밈 (meme)은 이미  어린 시절 이 그림을 통해 구체화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편 이 그림이 불편해지는 것은 인형처럼 차려입은 그녀가 책을 통한 지성의 고양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지적 허영에 어울리는 더 높은 배우자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처럼 보여서다. 현숙한 아내가 되기 위한 지적인 조건의 필요충분조건 같은 것 말이다.  이 작품은 분명 유년기의 내게 책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작품이지만 그림 속 여인은 마네킹처럼 굳어있다. 인식의 꿈틀거림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 눈의 착시일 수도 있지만.... 그녀 내면의 이글거림을 보지 못하는...



 남존여비 사고가 뿌리 깊었던 조선에서의 여성 독서는 '불허'를 넘어 '금단'의 영역이었다. 조선 후기 윤덕희(1685~1766)가 그린 그림은 여자가 책을 읽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다.          

서양의 책 읽는 여자 그림이 익숙한데  조선 후기 윤덕희의 그림은 

연출되지 않은 표정, 정갈한 색채로 시선을 붙잡는다. 

섬세하게 표현된 옷의 주름들.  화조도가 있는 풍경.. 단정한 옷차림과 머리 장식으로 양반 계층으로 보이는 그녀의 꿈꾸는 듯한 표정은 아름답다. 아마도 조선시대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던 곳에서 대여한 책이 아니었을지... 아니면 남편이 출타한 뒤 사랑에서 가져온 책이었을까.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마음껏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앙리 마티스의 작품 <낭독> 혹은 <세 자매>

서로 다른 자세와 서로 다른 분위기를 지닌 세 여인

때로는 내향적으로 때로는 감각적으로 때로는 도상 같은 표정을 한 세 여인

“세 개의 별 같은 여자들은  다양한 신회적 연상을 허용한다. 우아함을 상징하는 세 명의 로마여신. 원래는 세명이었다가 9명으로 늘어난 예술의 수호신 뮤즈, 그리고 고대 신화에 니오는, 생명의 줄을 짜고 연장시키고 마지막으로 끊어버림으로써 인간에게 운명을 나눠준다는 운명의 세 여신이 떠오른다.  마티스의 회화는 이런 연상작용과 벌이는 일종의 유희다.   (P222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이 작품의 제목이 '낭독'에서 '세 자매'로 바뀐 이유가 궁금해진다. 초록 옷의 여인이 책을 낭독하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은 오만하거나 무심하거나 무표정한 표정을 하고 있다. 눈으로 읽는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책과 귀를 통해 들려오는 청각적 이미지로서의 책은 다르다. 마티스가 세 여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 



독서는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위험 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독서는 삶의 계획만이 아니라 신이나 남편, 행정부, 교회 같은 좀 더 높은 기구가 내리는 지시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만든다. 독서는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상상력은 사람을 현실에서 끄집어내 데려간다. 하지만 어디로? 독서가 아직도 통제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묻는다. 통제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신, 남편, 행정부, 교회 등)은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면 신은 독서에 대해서는 한 눈을 감고 못 본 체할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한다

“ 나는 가끔 꿈을 꾼다. 최후 심판 날의 동이 트고 위대한 정복자와 법률학자가 자신들에게 주어질 보상을 받기 위해서 올 떼. 전능하신 신께서 우리가 팔에 책을 끼고서 걸어가는 것을 보시게 되면 그때 그분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려 질투심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는 하기 힘든 어조로 말씀하실 것이다

“ 보아라. 더 이상 어떤 보상도 필요하지 않아, 이곳 천국에서는 그들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어. 그들은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 ”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인용  p 274-275)

    


그대는 자기만의 방을 가졌는가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단조롭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 I find my self saying briefly and prosaically that it is much more important to be oneself than anything else."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부설 여자대학에서 강의 초청을 받고 페미니즘에 의거하여 작성한 강연문을 수필형식으로 남긴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집, 자기만의 세계처럼 자기만의 것에 대한 것들이 수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한마디로 여성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시대에 ‘여성들은 왜 자기만의 것을 가질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촉발시킨 셈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왜 항상 남성만이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차지하는가?, 왜 여자 셰익스피어는 나올 수 없는가?’라고 물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여인들의 자궁과 가슴을 거쳐 갔으며 단 한 번이라도 아이를 출산하고 키워본 여성이라면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잘 알 것이라 말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인 여유 1년에 500파운드 정도의 고정적인 소득이 주어진다면 그 어떤 여자라도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현 존재를 견디는 유일한 방식은 영원히 지속되는 광란의 축제처럼 문학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 어떤 문장보다도 마음에 드는 구절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자기만의 은밀한 광란의 축제에 빠져드는 것.

손에 한 권의 책이 있는 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떤 총과 칼보다 핵폭탄보다도  세상을 전복시킬 위험한 도구...  책


슈테판 볼만의 말처럼 

"책을 읽는 자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깊이 생각하는 자는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은 대열에서 벗어나고

대열에서 벗어나는 자는 적이 됩니다."      


굴종적이고 길들여지는 대오에서 벗어나는 힘, 자신의 자아를 찾는 힘,  실존을 고민하게 하는 힘...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 그 모든 힘의 원천인 책을 읽는 아침이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지음/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선정도서

무던히도 책을 많이 읽었다. 지금도 읽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끝없이 읽을 것이다.

읽다 보니 넘치는 것들이 생겨나고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삶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시작한 읽기가 어느 순간 허기를 채우기 위한 쓰기가 되었다.

자신의 독자적 생각을 갖게 되어 대오에서 이탈하게 되어...

설령 세상의 '적'이라 불릴지라도 나의 읽기와 나의 쓰기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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