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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사람이 살만한 나라에서 살 만한 언어 찾기    

      

"나는 비록 종이 한 묶음, 뾰족이 깎은 연필 한 통, 타자기 하나를 가지고 혼자사 글을 쓰고 있지만 나 자신이 혼자라고 느낀 적은 없고 항상 뭔가에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시간과 동시대성에 연결되고, 한 세대에 의해 체험되고 경험된 것에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   하인리히 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년 작)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언론이 한 개인의 명예와 인생을, 그 개인과 연결된 사람들의 삶까지도 처절히 파괴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변호사 블로르나 부부의 선량한 가정부이면서 성실한 삶을 살아왔던 여인 카타리나 블룸은 언론의 허위 보도와 그에 호응하는 군중에 의해 살인범의 정부, 테러리스트의 공조자,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왜곡되어 소개된다.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한 일간지 기자(퇴트게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27세의 평범한 여인 카타리나 블룸은 경찰을 찾아와 자신이 그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고 자백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가정관리사로 일하면서도 늘 성실한 태도로 주위의 호감을 샀던 카타리나가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화자는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2월 20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간의 그녀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보고한다. 

수요일 저녁, 카타리나는 카니발 시즌 댄스파티에서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나 첫눈에 반해 함께 밤을 보내는데 이튿날 경찰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벌인다. 괴텐은 은행 강도에 살인 혐의로 계속 언론과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이었다. 

사진 기자 쇠너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카타리나 블룸이 바이츠메네와 뫼딩을 양옆에 두고 무장 경찰들의 엄호를 받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장면을 찍었다. 정면에서 뒤에서 앞에서 수시로 카메라 세례를 받자 그녀는 부끄럽고 당혹스러워 얼굴을 가리려 했는데.. 머리가 헝클어지고 불쾌하게 일그러진 그대로 사진에 찍혔다.     

차이퉁지에는 그녀의 사진과 함께

“ 살인범 약혼녀 완강! 괴텐의 소재에 언급 회피! 결찰 초비상! 이란 헤드라인을 실었다. 


 카타리나가 경찰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식은 특종을 찾아 헤매던 일간지 기자 퇴트게스에게 포착되고 그 이후부터 일간지 '차이퉁'은 자극적인 기사거리의 먹잇감으로 카타리나 블룸을 선택하고 그녀의 일상은 낱낱이 가십거리로 보도된다. 언론의 보도가 강도 용의자 괴텐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강변 아파트를 소유하고, 포르셰를 타고 다니며 빼어난 미모를 지닌 26살 젊은 가정부 카타니라 블룸에 집중된다.

그녀의 아파트가 모의의 본부였나, 아니면 도당들의 아지트, 혹은 무기를 거래하는 장소였나? 이제 겨우 스물여섯 살인 가정부가 어림잡아도 110,000마르크나 나가는 아파트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나? 은행에서 강탈한 돈의 분배에 관여했나?     

퇴트게스의 자극적인 소설 쓰기는 날마다 특종으로 연재된다. 기사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위장한 공산주의자가 되고, 그녀의 어머니는 교회 재산을 절도한 파렴치범이 되고, 그녀 자신은 타고나길 “얼음처럼 차갑고 타산적”이며 범죄자와의 정사도 마다하지 않는 “창녀”와 같은 인물이 된다. 


허무맹랑한 날조와 왜곡을 남발하는 언론의 보도가 잇따른 가운데, 카타리나는 경찰의 심문에 응해 차분히 진술을 이어 간다. 그녀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 조서에 기재되는 것을 거부하며,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고자 심문 과정 내내 민감한 태도를 유지한다.     

블로르나 부부를 가리킨 “선량한”이라는 단어를 놓고도 이와 유사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서에는 “나에게 친절한”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블룸은 “선량한”이라는 단어를 고집했다. “선량한”이라는 단어가 유행에 뒤진 것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이 단어 대신 “호의적인”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그녀는 화를 냈으며, 친절과 호의는 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자신에게 보여 준 블로르나 부부의 행동을 선함으로 느꼈다고 주장했다.     

진실 그대로 진술하기를 원하는 카타리나식 화법은 자극적인 언론에 의해 무시되고 왜곡된다. 

기사를 사실로 믿는 사람들, 심지어 친절했던 이웃들 까지도 왜곡된 기사를 어느 정도 믿기 시작했다.

한때 그녀와 가깝게 지냈던 “선량한” 지인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게멜스브로이히의 신부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위장한 공산주의자였고 어머니는 내가 측은한 마음에서 한동안 청소부로 일하게 해 주었더니 미사용 포도주를 훔쳐 제의실에서 정부와 술판을 벌인 적이 있지요.”     

이혼한 전남편, 방직공인 빌헬름 브레틀로는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녀가 왜 내게서 몰래 떠났는지. …… 그녀는 출세하고 싶었던 겁니다. 어떻게 올곧고 소박한 노동자가 포르셰를 탈 수 있겠습니까? ……그녀를 좋아하는 나의 복잡하지 않은 애정보다는 살인범이자 강도인 한 남자의 다정한 애무를 그녀가 더 좋아했다는 것을 듣는 마당에, 그래도 난 그녀에게 호소하고 싶군요. 나의 귀여운 카타리나, 당신이 내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나이 든 농부 메펠스가 말했듯이, 다른 회원들도 소름 끼쳐하며 카타리나를 외면했다. 그녀는 항상 기이했고 항상 새침하게 굴었노라고 했다.     

대중의 저속한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언론이 왜곡, 날조한 기사 내용은 그 대중의 입맛대로 입방아에 올랐다. 카타리나의 우편함에 가득한 선정적인 내용의 편지,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음란 전화들...     

결국 한 개인의 삶을 해체, 파멸시키는 언론의 야만성에 진저리를 친 카타리나는 자신이 잃어버린 명예를 보상받기 위해 퇴트게스를 살해하고 자수하면서 그녀가 사랑하는 괴텐이 있는 것으로 가기를 희망한다.

      


카타리나 블룸은 아침식사를 하고 <존탁스차이퉁>을 읽은 뒤 베두인 여자로 가장하고 기자들이 모이는 술집으로 향한다.          

- 내가 기자들의 술집에 갔었던 것은 그저 그를 한 번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인간이 어떻게 생겼고, 행동거지는 어떠하며, 말하고 마시고 춤추는 모습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내 삶을 파괴한 바로 그 인간 말입니다. 난 그전에 콘라트의 집에서 권총을 가져왔어요. 내가 직접 장전까지 했어요,.. 난 술잡에서 한 시건 반에서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지 않았어요. “ p139             

  

“어이 귀여운 블룸 양, 이제 우리 둘이 뭐 하지?.. 일단 섹스나 한 탕 하는 게 어떨까?”

그 사이 내 손은 핸드백에 가 있었고 그는 내 옷에 스칠 정도로 다가왔어요.‘어디 한탕해보시지. 

'이판사판이니까.’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쏘았어요. 두 번 세 번 네 번 정확히 몇 발인지를 모르겠어요.

그는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어요. 영화에서 어떤 이가 갑자기 날벼락 맞듯 살해될 때처럼 놀라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군요." 

  

4시까지 소주를 따르고 맥주통의 꼭지를 틀어 잔을 채우고 샴페인 병을 따고 청어말이를 서빙했어요. 그리고 근처 교회로 갔어요. 30분쯤 앉아있었을 겁니다. 어머니를 생각했고. 어머니의 고통스럽고 저주받은 삶을 생각했어요. 불평불만이 많은 아버지도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누구와 해결할 일이 생기면 완전히 비굴하게 징징댔어요. 남편 브레틀로도 생각했어요. 그가 퇴트케스에게 했던 더러운 말도, 내 돈을 뜯어먹기 위해 영원히 뒤를 따라다니던 오빠도 생각했어요. 물론 신부님도요. 학교 다닐 때 나를 보고 “우리 작은 빨갱이 카타리나”라 부르던 신부님을요. 루트비히도 생각했고요. 교회는 나와 영화관으로 갔다가 다시 교회로 갔어요.

베게링 카페로 가서 진한 커피를 마시고 택시를 잡아타고 뫼딩의 집으로 갔어요 p140         

           


이 소설에는 ‘키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가 있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하인리히 뵐은 “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며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신물도 아닌, 그거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작품의 모델은 1972년 1월 바더 마인 호프 일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언론의 비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직까지 되었다가 나중에 무혐의로 복직되었으나 상당한 명예 실추를 경험했던 하노버 공대 심리학 교수 ‘페터 브뤼크너’라고 한다.      


소설에서 카타리나 블룸은 자극적 기사를 품어내던 차이퉁의 기자 퇴트게스를 살했했지만 퇴트게스의 후임자 에긴하르트 탬플러는 블로르나의 뒤를 추적하며 빨갱이의 자금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걸까?라는 제목의 자극적인 소설을 여전히 쓴다. 기자 한 명을 없애는 것만으로 그녀의 명예는 회복될 리 없다. 다만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을 것이다. 차이퉁이라는 거대한 적 앞에 권총 몇 발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카타리나는 루트비히 괴텐이 강도 용의자, 지명 수배범인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 인생에 앞으로 오기로 되어있었던 남자인 것으로 생각한다. 나중에야 그가 지명수배범인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다.  별장 열쇠를 맡기며 지나칠 정도로 그녀에게 집적대던 슈트로입레더의 별장은 괴텐의 아주 잠깐 은신처가 되었다. 

사랑이란 기막힐 정도로 기막힌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범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자임에도 사랑하는 것..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황색 언론과 카타리나 블룸의 대결.. 애초에 대결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색하지만.. 어쨌든 언론에 의해 지극히 사소한 일상이 범죄로 포장되는 폭력에 대한 것이지만     

루트비히 괴텐과의 미래를 생각하는 카타리나의 모습에는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출소하면 괴텐은 35살, 그녀는 36살.. 그가 먼저 출소하면 그녀의 재산을 그가 관리하게 하고 레스토랑을 하거나 그런 생각을 카타리나는 한다.

독자들의 질문에는  "출소 후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괴텐과 함께 살기를 갈망하는 삶이 생각처럼 행복할까?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카타리나 블룸인체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굳이 괴텐의 아내로서 행복할 필요가 있는지?

그 또한 전남편과 다르다는 보장이 있는지?

그녀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도로를 달린다고 진술했다.

무의식적, 의식적인 자유를 누리던 그녀는, 철저함과 성실함으로 직업적 신뢰를 쌓아가던 그녀는 강도의 정부, 빨갱이라는 모욕을... 게다가 요양원의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 죽음까지도... 오직 어느 날 갑자기 카니발 시즌 댄스파티에 들어온 알 수 없는 남자로 빚어진 일이다. 남편 브로톨리의 다정함이 아닌 치근대는 것을 견딜 수 없다 했던 그녀는 단지 하루 밤을 같이 보내고 댄스파티에서 저녁 7시 30분부터 10시까지 오직 그와만 춤을 추면서 괴텐을 ‘나에게 올 남자’였다고 단언하는 것이 카타리나 답지 않게 지나치게 비이성적이다. 가정부로서의 냉철하고 철저한 그녀의 생활방식과 사랑방식은 별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타리너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해  하인리히 뵐은 부제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고 달았지만 나는 그녀와 괴텐의 불가해한 사랑에 의미를 두고 ‘혹은 사랑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로 달고 싶다. 


실제 괴텐의 살인혐의는 입증된 바 없고 은행 강도가 아니라 두 개 연대 군인의 급여와 적립금이 들어있는 금고를 약탈한 것, 장부 위조, 무기 절도가 확인되었다.     

사실인 것, 사실이 아닌 것, 대다수의 사람들은 확인하지 못한다.

신문에  도배된 자극적인 몇 줄의 언어가 세상을 얼마나 좌지우지하는지..


원천들’이니 ‘흐름’이니 하면서 ‘구성’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 대신 집결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이 개념은 어린 시절 웅덩이를 가지고 그 안팎에서 놀아본 적이 있는 - 웅덩이들을 파고, 물길들을 서로 연결해 웅덩이를 비우기도 하고 물길을 옆으로 돌리거나 다른 쪽으로 바꾸어서 마침내 가지고 놀 수 있는 웅덩이의 물 전부를 하나로 모아 흐르게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분명하게 이해할 것이다. 이는 모은 물을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게 하거나 가능하다면 규칙대로 혹은 순리대로 당국에서 만들어 넣은 하수관이나 배수관으로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    

 모은 물을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게 하거나, 가능하다면 규칙대로 혹은 순리대로, 당국에서 만들어 놓은 하수관이나 배수관으로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다름 아닌 일종의 배수 혹은 물 빼기 작업이다. 명명백백한 정리 과정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때때로 수면 차이나 수면 조절이 필요한 흐름을...

긴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말로 불가피한 정체된 상황들이 있다. 물을 뺀 바닥이 금방 보이도록 모든 원천의 방향을 단순에, 그리고 한꺼번에 돌리고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본 적이 있는 웅덩이 물길 바꾸기 놀이... 내가 진흙을 이어 붙여... 물길을 만드는 것... 물길은 나의 손에 따라, 나의 왜곡된 몸짓에 따라 원래의 방향을 틀어 흘러갔다.

물의 흐름.. 세상의 흐름... 결국은 흐름을 움켜쥔 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마련인 것.

 


그녀가 블룸에게 준 오려 낸 신문 기사 열다섯 장은 카타리나를 전혀 위로하지 못했고, 그녀는 그저 이렇게 묻기만 했다고 한다.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64p -     

아무리 다른 '선량한'언론이 이 제대로 된 기사를 보도했다 하더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쥐고 있는 (사회의 물길 정도는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차이퉁의 보도를 사람들이 더 많이 읽고 어느 순간 왜곡된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제대로 된 언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를 지닌 언론이 필요한 때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의 언론 또한 소설 속 차이퉁과 전혀 다를 바가 없으니까./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지음/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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