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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나는 몰라

파블로 네루다의 시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영화 『시』 (詩·Poetry)에는 시를 찾아 헤매는 60대 할머니 미자가 등장한다. 시상을 찾기 위해 나무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사과를 들여다보고 설거지 통을 들여다본다. 그래도 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미자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머릿속에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詩)’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나는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그건 목소리는 아니었어 

말도, 침묵 아니었어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시, 언제였는지, 어디서였는지, 어떻게였는지

말이었는지 침묵이었는지 그림자였는지 알 수 없다. 저마다의 가슴에 시가 찾아오는 날은... 인생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리는 날일까. 시를 쓸 수 없는 날도 있다. 

가슴 밖으로 뱉어내고 싶은 말도, 뱉어내고 싶지 않은 말도 모두 웅크리고 있을 때.

언어들에 질식할 거 같은 날들이 있다. 살다 보면...   

       


< 시 >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나는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니야, 그건 목소리는 아니었어 

말도, 침묵 아니었어 

하여간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어 

밤의 가지에서,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거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의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이창동 감독의 2010년 영화 『시』 (詩·Poetry)는 2010년 칸영화제(Cannes Film Festival)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23년 1월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난 윤정희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는데  작품 속 주인공 미자는 알츠하이머병의 초기 증상을 보이는 60대 할머니다.         

  

중학생 외손주를 키우는 생활보호대상자이며 중풍에 걸린 강노인의 요양보호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간다. 서민 동네에 살면서도 그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잘 차려입고 다니는 것은 허세가 아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관객들은 느낄 수 있다.  사람을 대할 때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말을 걸고 가끔 엉뚱한 말을 해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여인, 해맑은 소녀 같은 그녀가 우연히 버스 정류장에서 시 강좌 안내문을 보고 시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무엇이든 진짜로 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슴속에 시를 가둬두고 살잖아요. 시를 쓰는 일은 가슴속의 시를 찾아오는 일입니다.”

“언제  시상이 찾아오나요? 어디로 시상을 찾으러 가면 되는가요?”

“시상은 주변에 있어요. 찾으러 가는 게 아니고요. 설거지통 속에도 있어요.”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렵다.”     

사과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애를 쓰는 미자.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시상이 떠오르지 않자

“사과는 깎아먹어야 제 맛이지.”라고 중얼거리며 깎아먹는다.      

물질의 세계로 보면 지극히 가난하고 소외된 조손가정, 외손자 종욱을 돌보는 할머니 미자.

그러나 미자의 천진함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학교 내 성폭력 사건으로 자살한 희진의 죽음을 앞에서 가해자 6명의 부모는 돈 3000만 원(1인당 500만 원)으로 무마하려 들고 희진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해자인 자기 아들들의 미래다. 학교는 학교대로 소문이 번져나가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합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손자 종욱이 가해 소년 중 한 명임을 알게 된 미자는 절망한다. 희진(아녜스)의  장례 미사가 열리는 성당에 들어가 희진의 사진을 가지고 와 집안 식탁 위에 놓아둔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게임을 하는 종욱이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기를 바라지만 변하지 않는다. 희진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외진 곳, 과학 준비실을 유리창너머로 들여다 보고 희진이 뛰어내린 다리 위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미자의 하얀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물에 떠내려간다. 


사물을 제대로 바로 보기 위해 쉼 없이 메모를 하는 것...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하려는데 그녀의 수첩 위로 빗방울이 떨어진다. 종욱을 위한 합의금 500만 원을 마련해야 하는 현실은 시가 될 수 없는 현실이다. 온몸이 젖은 채로 은근히 자신을 탐하던 강노인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고는 돌아 나온다. 어쩌면 그녀 자신이 중학생 희진의 상황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다.

희진이 자포자기 상태로 결국은 죽음을 택했지만 미자는 종욱을 위해서가 아닌 희진의 엄마를 위해 돈 500만 원을 마련하고... 그것이 죗값을 갚는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한다.

손자의 합의금을 마련한 미자는 희진의 죽음 앞에 고통을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그렇게 미자는 진짜 시를 쓰게 된다.  미자는 게임방에 있는 손자를 불러내 피자를 사 먹이고 돌아와 손자의 발톱을 깎아준다. 종욱을 태우러 경찰차가 온 밤, 그녀는 종욱과 배드민턴을 친다.

종욱이 진심으로 뉘우치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마지막 사랑고백인 셈이다.      


이 창동 감독은 이 작품에서 노인의 소외와 빈곤과 우울, 노인들의 성문제, 학교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돈으로 덮어버리려는 어른들의 위악성을 보여준다. 희진의 엄마를 만나 사과하러 그녀가 일하는 밭으로 가지만 길에 떨어진 살구 이야기만 하다가 돌아오고 마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시 강좌의 마지막 날, 미자는 자신이 쓴 시와 함께 꽃다발을 강사의 자리에 올려놓고 사라진다. 부산에 사는 딸도 미자의 집에 왔지만 아무도 없다. 미자가 죽은 소녀 아네스를 위해 쓴 ‘아네스의 노래’만이 퍼지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녀가 어디로 갔을지는 누구나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미자는 언제가 바람에 날려 강물로 떨어지는 새하얀 모자처럼, 아네스처럼... 그곳으로 갔다. 자유롭고, 아름답게, 시 한 편을 남겨두고..         

 


배우 윤정희(79·尹靜姬 본명 孫美子)가 2023년 1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세례명이 데레사인 그녀의 장례는 파리 근교 벵센(Vincennes)의 한 성당에서 치러진 후 화장 뒤 인근 묘지에 안치됐다. 백건우 씨는 장례 미사에서 진혼곡(鎭魂曲)으로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requiem) 작품 48에 수록된 ‘낙원에서(In Paradisum)’를 골랐다고 한다. 백건우는 윤정희 씨의 장례식에서 “우리가 삶을 받아들이듯,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참 중요하며, 죽음을 어떻게 아름답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대한 고뇌였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모두 그늘이 함께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으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을 가슴으로 느낄 때 진정으로 시를 쓸 수 있음을 미자를 통해 보여준다.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영화감독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나의 오랜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엔딩으로 나오는 시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던 배우 윤정희도 미자처럼, 희진처럼 그곳으로 건너갔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


나는 레퀴엠의 ‘낙원’에서를 들으며   윤정희 선생님께 묻고 있다

“그곳은 어떤가요?  아름다운 가요? 이곳이 아름답지 않다면  아름답게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라고/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지음/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옥타비오 파스 <시>


보고 말하고 침묵하고 꿈꾸고...

그 모든 것을 잊어가는 것..

그 사이

그것이 결국은 시가 된다는 것을

그것이 결국은 저마다의 인생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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