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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폭풍이 불어도 변하지 않는...

샌드 스톰(2016)_일리트 젝세르 감독

샌드 스톰(2016)_일리트 젝세르 감독     


이스라엘 베두인 마을,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베두인 족 전체의 이야기다.     

영화의 첫 장면은 모래사막길을 달리는 차, 자본의 냄새가 선명한  toyota... 자동차.

대학을 다니는 딸 라일라와 아버지 술리만이 탄 차다. 라일라는 운전을 하고 아버지는 딸의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낸다. 지극히 평범한 부녀간 대화가 오가다가 마을에 진입해서부터는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라일라가 조수석으로 옮겨 앉는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 결혼을 축하해”라고 말한다.

20대 라일라의 결혼이 아니라 아내와 4명의 딸을 둔 아버지 술리만의 두 번째 결혼이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 라일라의 엄마이자 첫 부인인 잘릴라는 결혼 파티 준비로 정신이 없다.

베두인족의 고유한 풍습이겠지만 신랑과 신부는 각자 따로 파티를 즐긴다. 새 신부를 위한 파티는 오직 여자들만을 위한 파티, 신랑을 위한 파티는 오직 남자들끼리의 파티다. 밤이 되면 신랑과 신부가 비로소 만난다.      

잘릴라의 고단한 표정이나 꾹 다문 입,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불편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새 여자와 남편이 함께 누울 침대를 정돈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가뜩이나 마음도 좋지 않은데 침대 모서리에 옷이 찢기는 바람에 라일라와 옷을 바꿔 입고 파티에 참여한다. 라일라의 휴대폰이 옷 속에서 울리면서 잘릴라는 라일라가 다른 부족의 남자와 사귀고 있음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만나지 말라고 강요한다.

남편은 새 여자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는데 발전기가 고장 나 전기를 켤 수도 없고 세탁기를 돌릴 수도 없다. 빨래를 빨래통에 담그고 손빨래를 하는 잘릴라.. 잘릴라의 화풀이 대상은 눈앞에 보이는 빨래와 라일라뿐이다.


라일라의 남자친구가 술리만에게 정식으로 자신들의 관계를 말하고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데... 술리만은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다음날 돈 많고 나이 많은 남자와 라일라를 결혼시키기로 잘릴라에게 통보한다. 잘릴라는 딸이 다른 부족의 남자와 연애를 하는 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잘 키운 딸이 돈을 빼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술리만에게 당신 딸 수준에 맞는 좋은 남자를 찾아오라고 하는데 그말로 인해 이혼을 당하고 순식간에 가정이 해체된다.

엄마가 쫓겨난 집. 아직 어린 동생들은 라일라에게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고... 모든 꿈과 의욕이 사라진 라일라도 앞날이 어둡다. 텅 빈 냉장고를 열어보다가 새엄마 집에 가서 식료품을 얻어 오는 길. 아빠를 만나 대화를 하고 싶어 하지만 아빠는 화를 내며 대화를 거부한다.     


라일라는 아빠의 차를 몰고 엄마가 있는 외할머니집으로 어린 동생들을 데려다주고 애인과 함께 마을을 떠나기로 하는데... 이제.. 터널만 통과하면 사랑하는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

그 터널의 한가운데서 라일라는 차를 멈추고 울음을 터뜨린다.

자신이 사랑을 찾아 떠나는 행위가... 가족에게는 엄청난 불행과 불명예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 때문에 이혼까지 당한 엄마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터널 안에서의 눈물. 터널을 통과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꼭 터널을 지나야 해"

라일라는 긴장하며 터널 속으로 진입한다. 터널.... 

밝음에서 어둠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터널은 그런 곳이다.

이제까지의 밝음을 잊고 어둠으로 진입하고... 그 어둠에 익숙해질 만하면 다시 밝음을 향하게 되는

그 어둠 안에서... 라일라는 자신의 밝음을 위해 가족의 어둠. 특히 엄마의 어둠을 원치 않았다.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안다..... 그 터널을 통과한다고 하여 베두인의 가치와 문화가 바뀔 리 없음을 안다.


차를 돌려  베두인족 남자들만이 모이는 장소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늦은 밤 딸의 방문에 놀란 아버지는 딸을 서둘러 차에 태우고.... 딸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여러 명의 남자 중 누가 정혼자인지를 묻는다. 


아버지는 "잘 살 거야. 좋은 남자야... 나를 믿지?"라고 말하지만

라일라는  "나는 아빠를 안 믿어요."라고 잘라 말한다     

아버지가 정한 남자를 받아들이는 대신 아버지는 다시 어머니를 받아들이라는 조건을 내거는 라일라.

 “내게 선택권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고 몰아세운다. 

사랑의 모래폭풍으로 한 바탕 난리가 난 것 같은 가정의 분위기가 라일라가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순식간에 잠잠해진다. 사막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곳에 부는 모래폭풍의 위력을 나는 알 수 없지만 모래가 움직이면 만드는 언덕들... 날마다... 변하는 풍경들을 생각한다...


아무리 모래폭풍이 일어도 변하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민족의 정서 같은 것, 뿌리 깊은 문화...

아무리 사나운 모래 폭풍이 불어도...     

라일라가 세명의 어린 동생을 외할머니 집으로 데려다 주자 외할머니는 차로 달려와 자동차 키를 뺏는다.

 "라일라, 넌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하지만 외할머니 손에서 자동차키를 뺏어 라일라에게 돌려준 것은 바로 엄마 잘릴라였다.

잘릴라는 딸이 사랑을 찾아 떠나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자동차 키를 넘긴다.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딸을 보호하는 엄마들... 외할머니는 잘릴라를 보호하고 잘릴라는 라일라를 보호하고...

또 라일라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려 들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린 딸을 보호하려는 세상의 모든 늙은 딸들...  

라일라의 돈 많은 남편은 라일라에게 싫증이 나면 일부다처제를 이용 새 아내를 얻을 것이며 라일라는 또 자신의 아이들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고...  어쩌면 엄마 잘릴라의 삶을 되풀이할 것이다.

아무리 대학교육을 받고 똑똑하고 현명해도 한 여자의 외침만으로 그 부족의 오래된 전통을 깨는 일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다만 샌드스톰(모래 폭풍) 영화에 적어도 희망은 있어 보였다.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어디에선가 느리지만 은밀하게..

라일라에게서 일어나는 변화, 라일라가 일으키려는 변화는 결국 흔적으로만 남고 말았지만

동생 타밀라, 아마도 타밀라가 라일라만큼 성인이 되면 타밀라는 강요된 침묵과 수용에 반기를 들것이다.     

남자어른들의 모임에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쉽게 끼어들 수 있다. 타밀라는 아빠 옆에 앉아 남자들 사이의 정보와 동향을 읽는다.  타밀라는 그런 곳에 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무시하고 집을 나선다.  엄마가 쓰고 가라는 히잡 따위는 울타리에 걸어 놓고 달려간다.


아빠와 새 여자가 같은 방에서 마주 보는 장면, 웃음을 짓는 두 사람을 훔쳐보고 눈물을 흘리는 타밀라... 

또다시 똑같은 풍경을 훔쳐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미모의 신부... 언니 라일라와... 한눈에 보아도 멍청해 보이는 신랑.

라일라는 보라색 벽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대고 신랑은 그럼 빨강?  파랑? 분홍으로?? 바꿀까를 묻는다...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럼 분홍??? 신랑의 집요한 질문에...

창밖에서 “싫어”라는 명료한 대답이 들린다.

놀란 신랑과 신부...  창밖에는 타밀라가 고개를 내밀고 그들을 보고 있다

영화의 끝 장면이다.


타밀라의 ‘싫어’라는 한 마디는 인습과 관행으로 굳어진 가치의 변화를 암시하는 말이다.

누구보다도 언니가 가족을 위해 사랑을 버린 것을 알기에... 딸들에게는 더없이 친절하고 좋은 아빠지만 맘 마음 먹으면 언제든 새 아내를 수시로 들여올 수 있는 아버지를 불신하기에...     

일부다처제 문화 속 여인들의 위치란....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 같은 것. 돈만 있으면 하루에도 몇 명의 아내를 살 수 있는...          

그리고 그 아내들은 새 아내를 위해 파티를 준비하고 침실을 꾸미고 새 아내를 위한 옷을 준비해 주고... 

물론 한국에도 오래전 이런 문화가 있었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아들을 낳기 위해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아내들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긴장하면서도 자매처럼 잘 지내야 했던...... 

          

현실과 이상... 라일라는 이상을 접고 현실을 택한다.

연인을 따라 떠난들... 그녀를 호의적으로 받아줄 문화도, 사람도 없을 것임을 알기에.     

사랑 하나가 가져올 파괴력을 감당하기는 버겁기에,  자신이 택한 사랑이 결국은 자신과 똑같은 여자인 어머니를 파멸시키는 것임을 알기에..새로운 길을 찾는 데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희생의 대상이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되기에.... 현실을 택한다.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말을 누군가 한다면

나는 사랑이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고 말하고 싶다.

잔인한 것이라고... 

희생과 사랑은 분명 다른 가치인데 희생을 사랑의 고귀한 가치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분명 라일라는 연인과의 사랑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고... 가족의 사랑을 지켰다.


나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나를 소모시키고 싶지 않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자꾸만 모래폭풍이 일었다...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선정

오랜 세월 동안 동굴 벽에 박제된 존재의 외침들..

'여기 있음'이라는 존재의 몸부림 앞에 마음이 뜨거워진다.


절박한 환희, 낯선 익숙함

잊히지 않는 세상의 모든 처음들, 어떤 그리움들

당신과 나와 그들의 시간들, 빛의 환희들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질 세상의 모든 것들...

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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