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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결국은 관성적 삶으로부터의 해방.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긍께 사람이제...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정지아 작가는 작품 후기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말한다.  오만하고 이기적이었으며 실수투성이였기에 신이 다시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거부하겠다고.... 비극은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비극의 출발이었다고... 행복은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사실을...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고..."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던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도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연상시킨다. 다만 냉소적이지는 않다.   

  

P. 7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유머일 수밖에 없고 유머여야 하는 순간에도 내 부모는 혁명을 목전에 둔 혁명가처럼 진지했고, 그게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p16

바짓가랑이의 먼지 한 톨조차 인간의 시원이라 중히 여겨 함부로 털어내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시신으로 돌아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은. 참으로 이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아버지는 민중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다만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빨치산의 딸... 아리(백아산과 지리산에서 따온 이름)는 대학교 강사다. 아리라는 이름 따위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딱 벌어진 어깨, 소도 때려잡을 듯 강인한 육체를 지닌 혁명전사의 딸에 어울리는 걸맞은 육체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의 평가 기준에 따르면 '하의 상'정도 되는 외모를 지닌...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만난다. 

영정 속 아버지는 언제나 개인적 감상 따위를 부끄럽게 만드는 단호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 그거사 니사정이제. 나가 뭐하고 했간디.”영정속 아버지의 왼쪽 눈동자는 정면을 오른쪽 눈동자는 45도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고 이면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 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나의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부활하는 것..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248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고 남자이고 연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 친구이고 이웃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저 내가 몰랐을 뿐이다.          


누구든 그러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어쩌면 아버지 모습의 빙산의 일각인지도 모른다.

끝내 아버지는 자신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았고 전부를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젊은 아버지... 내 기억 속의 젊은 아버지는 내가 가공해 낸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실체란 없고 오직 '아. 버. 지'라는 기호만 남은...



P. 102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겠어, 이 밤중에!”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대개는 도움을 준 사람보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먼저 잊어버린다.


오죽흐먼..... 아버지의 18번...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버지를 달려가게 만드는 단어.

그 ‘오죽흐먼’은 때로 그리고 자주 아버지의 뒤통수를 후려쳤지만 아버지는 ‘오죽흐먼’의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끝내. 오죽흐먼은....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당위였다.

    

P. 68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생각했다.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생 무렵의 결론이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 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했다. 물론 두 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고통, 굶주림의 고통, 동료들이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아버지는 해방 전후의 한계와 여전히 맞서 싸우는 중이었고 그 사이 세상은 훌쩍 그 한계를 뛰어넘었다.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견디는 자, 견디는 능력을 지닌 자는 변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려는 자는 견디지 못하는 자다.

세상에 실망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그 세상을 전복시킬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이라도 전복시켜야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를, 세상을 견딜 수 없어 전복시키지도 못하였고 그렇다고 세상과 나를 잘 견뎌온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 밀려온다. 이렇게 많은 시간... 인생의 꽤 오랜 시간을 거쳐왔으면서도.... 나를 전복시키지도 나를 견디지도 못하는 나는...

혁명가도 순응자도 아니다. 바로 그 점이 나의 정체성을 묻게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늘 괴로워한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아버지에는 아버지의 사정이, 나에게는 나의 사정이, 작은 아버지에게는 작은 아버지의 사정이..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는 알지 못하고 또 어떤 사정은 자기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작은 아버지는 집안이  망한 것도, 할아버지가 죽은 것도 배우지 못한 것도 모두 아버지 탓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시절 탓이다.          


“니 사정이 점 어떠냐?”

“왜요?”

“괜찮냐? 이 말이다.”

“예”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아버지 본인을 위해 필요한 돈은 하루 사천 원이었다

마지막날은 과한 지출을 했다. 식대 8000원, 소주 1500원.... 생의 마지막날 아버지는 누군가와 1인당 사천 원짜리 만찬을 즐겼다. 상대는 박 선생이었을 것이다. 나는 하염없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할 듯했다. 


한 사내가 가고 없는 노동절 아침, 새벽녘의 지리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장엄했다.


    

p 76 아버지는 평생 당하고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폐배 했을 뿐이다. 십 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 둘 된 노동절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당하기로 하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다. 빨갱이의 딸인 나보다 빨갱이의 조카였기에 당한 고통은 더 컸다.

그 인생이 더 억울해 보였다.


부모와 자식... 선택불가인 관계가 가장 결정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적어도 고상욱은 사상을 선택했지만...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딸 아리는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빨갱이의 딸이 되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나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의 딸로 태어났고... 이른 새벽 늘 아버지의 타자소리를 들었으며... 지치도록 술을 마시던... 그리고 간 경화로 고통을 받았던 젊은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선택의 여지없이....

생각해 보면 영어선생이 된 것은 아버지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는 늘 원하던 길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이야기했다. 아마도 그것은 적어도 자식들만이라도 그런 후회를 대물림하지 말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아버지 역시 사상 운동을 하던 형으로 인해 대학교수가 되지 못하고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어린 내 눈에는 선생이나 교수나 그게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그 당시에 교수와 선생의 차이는 상당했다.

형으로 인해 아버지는 선택 아닌 선택을 했다... 아니 어쩌면 그 시대는 대부분 선택 아닌 선택을 하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p24

가을 녘 아버지의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 가지 꽂혀있곤 했다. 자줏빛 들국화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딱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인 들국화를 꺾었을 때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회주의자가 아닌 아버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갔어도 어느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숱한 순간의 아버지.

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중이었다. 혁명가도 아니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 진지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는 꼰대 같은 어른으로....


p 138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아버지는 

긍게 사람이제, 사람이니 실수하고 사람이니 배신을 하고 사람이니 살인도.. 용서도 한다는 것

나는 아버지와 달리 실수투성이 인간이 싫었다. 사람에게 늘 뒤통수 맞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탓인지도 몰랐다.           


"긍게 사람이제..." 그 한 마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에 이보다 더 명징한 답은 없다.

사람이기에 기대를 하고 사람이기에 실망을 한다.

사람이기에 판단하고 사람이기에 그 판단으로 상처를 입는다. 사람이기에 그릇된 길로 가고 사람이기에 다시 돌아온다.... 사람이기에 울부짖던 밤이 있고 사람이기에 기쁨의 아침이 있다. 고독한 새벽과 지쳐버린 오후가 있다.... 사람이기게 좌절이 있고 눈물이 있고 분노가 있다... 사람이기에 가능한 추함과 아름다움들.


174

한국전쟁 발발 직전, 아버지는 그때 민중의 실체를 보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스스로 곳간을 열어 먹을 것을 주단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숨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한테 득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리는 것이 민중이여, 민중이 등을 돌린 헥멩은 폴세 틀레묵은 것이제.”     


“가서 가마니맹키 가만히 엎드래서 살아남으씨요. 한번 반동은 영원한 반동이요. 반동을 워치케 믿고 일을  맡기겄소. 긍게 가씨요.”     

아버지가 시킨대로 가마니처럼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살아남은 순경.

삼십여년이 지나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를 찾아온 것

“뽈갱이 들은 누구라도 포섭을 해야 쓰는 것 아닝가요?”

“질 줄 알았응게”

“질게 뻔한 전쟁. 우리는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신념도 없는디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은혜를 갚을라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고 사람의 도리제.. 긍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함시로 사시오”     

질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갈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까?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불러보았다.

시체처럼 널브러져 단잠에 빠진 사람들. ... 어제와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가 존재했던 날,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날, 나로서는 최초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디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197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온다 또 온다 한다. 한 번만 와도 되는 데 한 번으로는 끝내 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엃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영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출소한 것은 1980 8.15

출소 후 연곡사 계곡에서... 우리 가족 최초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숨 막히는 어색함을 지닌채 며칠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아버지도 훌쩍 커버린 딸이 낯설었던 것. 아버지와 딸의 빼앗긴 6년은 영원히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과 같은 친밀함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추억, 두툼한 누룽지, 아버지의 등에 업힌 기억..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발버둥 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아버지를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 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그런 나를 생판 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아버지처럼 무심한 눈,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한 어깨에 두 짐을 지고 살아왔구나 작은 아버지나 나는 유약해서 혹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 어깨에 두 짐 못지는 거라고 스스로 나자빠진 것은 아닐까.          

 p265

“그때게 할배 맴이 요상허드래.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경찰보덤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레.“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들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자식이 아버지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아버지 또한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자식들은 자신의 기대는 정당한 것이고 아버지의 기대는 부담으로 여긴다. 아버지의 기대.... 나는 그 기대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버지에게 바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존재 자체로 대단한 존재였고 다가갈 수 없는 존재.... 두리반의 한가운데 아버지의 자리가 있었고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어야 비로소 숟가락을 들던 시대였다. 내게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반짝이는 검은 구두와 허물 같은 양복과..... 안경. 타자기... 그리고 수많은 책들.... 내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생물학적 유전자  gene 외에 사회문화적 유전자  meme.

생물학적 유전자보다도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신 문화적 유전자가.... 오늘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내 안 어딘가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뭉쳐서... 쓰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


나는 사실 핫한 도서라거나... 인기몰이... 누군가의 추천 등등의 도서에 별 관심이 없다.

대개는 소문과 달리 막상 읽었을 때 기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헤방일지'는 작년 추석 무렵부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해온 책이다.

하루종일 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아리의 빨치산 아빠 고상욱이 나를 붙잡아서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들... 이미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 선명해져서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해방이라는 말속에는 해방 전후 빨치산의 역사에 대한 의미가 담겨있지만

나는 죽음으로 인해 '생'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를 관성적으로 붙잡고 있는 생으로부터의 '해방'...  내 아버지를 억누르던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세상 모든 독자들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자기 아버지... 세상에 오직 한 분이었던 아버지를 끝없이 소환했으리라.... 아버지를 기억한다. 빨간 제라늄과 빨간 동백을 유난히도 좋아하던.. 여전히 내 기억 속의 젊고 찬란한 내 아버지를....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아버지의 타자소리는 생의 걸음 소리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오인태 < 등 뒤의 사랑 > 부분


늦은 밤 잠들지 못하고 캄캄한 방 한구석에 앉아있으면  소리들이 으르렁거렸다. 어둠이 몰고 오는 소리들은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삶의 자판을 누를 용기조차 없어서 어쩌면 기회였을지도 모를 젊음의 시간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무의미한 자기 합리화의 시간은 현실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비겁한 명분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아버지 눈에만 보였던 구멍과 아버지 귀에만 들렸던 개 짖는 소리를 이해할 것만 같다. 구멍 뚫린 삶, 결여가 만들어낸 구멍, 누구에게나 삶은 구멍처럼 여겨진다. 아득하고 두려운 것, 빠져들 것만 같은 공포에 몸부림치다 소스라쳐 일어나는 악몽처럼. 아버지는 삶의 구멍을 환자용 이불 한가운데서 찾아내신 것이었다.  

  20대 초입 내 삶에 뚫린 구멍 하나. 그것은 '그리움'이라 불리는 구멍이었고 평생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었다. 아버지가 이불 한가운데서 찾아낸 구멍도 어쩌면 '그리움'이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한다. 아버지의 귀에만 환청처럼 들려오는 소리들은 아마도 고향의 소리였을 것이다. 유년의 익숙했던 모든 소리들이 마당 넓은 집 누렁이 소리로 소환되어 들리는.....

  안경을 끼고 반투명 타자 용지를 갈아 끼우며 리듬감 있게 생의 자판을 두드리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병풍 뒤에서 듣던 타자 소리는 아버지의 운명 교향곡 같은 것이었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고 나도 아버지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이른 새벽 컴퓨터 앞에 앉아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린다.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생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들도 신명 난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른 새벽 자판을 두드리던 나를, 나의 소리를 어느 누가 기억해 줄까. 소리로 소환되는 기억을 뒤에 남겨진 누군가는 헤아려줄 것이다. 저 멀리 숲 속에서 저마다의 북소리 들려오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자판 위에서 아버지를 소환하고, 지금은 부를 수도 없는  이름을 적고 있다.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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