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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누구의 것도 아닌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잠.... 릴케처럼

인생을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

바람이 불 때 흩어지는 꽃잎을 줍는 아이들은

그 꽃잎을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꽃잎을 줍는 순간을 즐기고

그 순간에 만족하면 그뿐.

                             - 인생(Du musst das Leben nicht verstehe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r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묘비명'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체코 프라하 출신으로 삶의 내면을 응시하고  존재의 본질에 대한 작품을 많이 썼다.  ‘나의 모든 비상(飛上)은 내 피에서 시작되었다’는 예언 같은 말이 그의 작품 『말테의 수기』에 있듯 1926년 9월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읽고 먼 길을 찾아온 독자 (젊고 아름다운 이집트 여인)에게 직접 가꾼 장미를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주었는데 가시에 찔린 곳에 파상풍 균이 곪아 패혈증으로 확장되어 사망한다.       

 ‘가시에 깊이 찔려 생긴 상처가 왼손을 몇 주 동안 못쓰게 만들었고 아픈 것이 감염되어 오른손을 쓰는 것도 어려워졌다. 붕대를 매긴 했지만 두 손이 열흘 동안이나 쑤시고 아팠다. 이 사태를 극복하기도 전에 장염에 걸려 또 2주일이나 아주 쇠약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고 적고 있다.      


장미를 사랑했던 시인은 

‘장미며, 누구에게 맞서려고 너는 그 가시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는가?’

라고 물었던 것처럼 장미의 가시에 찔려 51세라는 젊은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겹겹이 싸인 눈꺼풀들 속 / 익명의 잠이고 싶어라.


그의 묘비명의 세 번째 문장 'Niemanders Schlaf'은 ‘누구의 것도 아닌 잠'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익명의 잠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순수한 모순... 누구의 것도 아닌 잠에 빠진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릴케의 묘비명만큼이나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나는 이 묘비명이 굉장히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문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 짧은 문구 속에 카잔차키스의 고뇌가 느껴진다. 우리의 눈에는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았던 그가.... 사실은 자유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될까 평생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에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그러하기에 자유라는 의미인데

이것을 바꿔 생각하면 '무언가를 원하기에, 원한다는 사실이 두렵고... 그러하기에 자유롭지 않다'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카잔차키스 자신은 물론 묘비명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원하기에 평생을 두려움과 걱정 속에 살다가 자유롭지 않은 인생'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지난해에는 제대로 피지 않았던 장미가 만개했다. 옥탑방 베란다에는 릴케의 장미 정원이 펼쳐져있다

지난겨울 무려 50센티미터나 쌓인 눈을 뚫고... 오직 죽은 듯 견디고 있던 가지에서 연둣빛 잎이 나는가 싶더니 엄청난 속도로 꽃을 피워냈다... 아무것도 '없음'에서 찬란한 '있음'을 만들어낸 장미..

벌써 꽃잎이 날린다. 아름다움을 피워내기란 그렇게 힘든데도 아름다움을 떨궈내기란 그렇게도 쉽다..

꽃잎들.. 현재라는 시간의 춤을 추며 사는 것은 장미나 우리나 같다.   

   

할 수 있는 한 장미 봉오리를 모아라.

오래된 시간은 끊임없이 날아가며

오늘 미소 짓는 바로 이 꽃도

내일이면 죽으리라.

(....)

수줍어하지 말고, 지금 이 시간을 붙잡아야 하리,

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하리

때를 한 번 놓치면

영원히 늦어지리니          

             로버트 헤릭      <처녀들이여, 시간을 소중히 하기를> 부분  


           

인생은 축제와 같은 것

하루하루 일어나는 그대로 살아가라.  날리는 꽃잎을 모으려 하지 말고.... 

벌써 지고 있는 5월의 끝에서 릴케의 목소리를 듣는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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