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키아라, 이제 불을 끌 시간이야.
고통과 그리움의 불을

'일요일의 병(enfermedad del domingo)'/스페인 영화

 '일요일의 병(enfermedad del domingo)' 

왜 일요일의 병일까? 생각했다.          

성경에서 일주일 동안 신은 하루에 하나씩 세상을 창조하셨고 마침내 일곱 번째날, 모든 창조를 완성하시어 쉬시며 거룩한 날로 삼고 복을 내리셨다고 한다.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고 있지만 유럽 대부분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은 휴식의 뒤에도 영생불멸하지만 인간은 저마다 생의 일을 마치면 유한한 생의 종착점이 기다리고 있다. 일요일... 어떤 휴식의 날이다.

어쩌면 죽음을 향해가는 은유적 의미이기도 하다.

유한한 인간에게 일요일이란 어쩌면 딱 죽기 좋은 날인지도 모른다. 

    

스페인 영화 ‘일요일의 병’ 첫 장면은 숲이 나온다.

울창한 한 여름의 숲이 아니라 나목이 된 나무.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키색 망토를 입은 한 여자(키아라)가 숲길을 오른다. 여자는 거대한 동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본다. 동굴 안에 무엇이 있을까.. 여자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들여다본다.

영화의 중간에 여자의 엄마(아나벨)도 환각 상태에서 동굴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가가 입을 틀어막는 악몽을 꾼다.

키아라와 키아라의 엄마 아나벨

동굴 안에 대체 무엇이 있었는지. 관객인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곰곰 생각해 보면 동굴의 외양이 자궁처럼 여겨진다는 것.

무언가를 품고 있는. 무언가를 품었다가 세상에 내어놓은... 그리고 마침내 신의 자궁 안으로 다시 들어갈.... 

거대한 바위 동굴은 그런 은유를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요일의 병’의 핵심은 키아라가 8살 때 집을 떠난 엄마를 35년 만에 찾아가 딱 10일 동안 엄마와 단 둘이 자신의 오두막집에서 함께 있기를 소망한다.     

대학교수이자 재력가인 남편과 재혼 후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알려진 아나벨. 아나벨은 파티를 앞두고 힐을 신고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 위를 또각거리며 걷는다.

세련된 옷차림과 잘 어울리는 은발. 당당한 눈빛. 갑자기 발을 삐끗하면서  멈춘다.

아나벨은 즉시 발이 삔 건 아닌지 살펴보고... 누가 보았는지를 살펴보고 다시 걷는다.     

항상 주변을 의식하고 살았던 아나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더’를 위해서 ‘더’ 얻기 위해 살아온....... 그녀에게 자기 관리, 이미지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니까


그런 그녀 앞에 35년 전에 버리고 떠난 딸 키아라가 나타난다.

“어떻게 날 찾았지?”“ 허영심 많은 사람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죠.”

“무엇을 원하는 거지? 원하는 게 뭐지?”

“없어요. 오직 10일을 함께 보내는 것.”     

한눈에 보아도 궁핍해 보이는 딸의 요구는  엄마와 함께 10일을 자신의 오두막에서 보내는 것이었다.     

카이라의 제안을 베르나베 부인(아나벨)이 받아들이는 대가로 변호사는 친권포기 각서에 서명을 요구한다. 혹시라도 친자임을 내세워 앞으로 더 많은 요구를 할 거라는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다.

친권 포기각서를 들이대자마자 키아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명한다

“ 10일 동안 어떤 일정이 있나요?”

“ 없어요.. 아마 무언가를 하긴 하겠죠.”     


아나벨과 키아라의 첫날

키아라는 요리를 준비하고 아나벨은 장작의 불을 지핀다.

“나무가 젖어서 장작의 불이 잘 안 붙는구나.”

“그래요. 내가 당신을 잊을 정도로..”아나벨의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키아라는 말한다. 

“난 학업을 중단했어요. 내세울 게 없죠.”

“개인적 성취가 꼭 이력서에 남는 건 아니지..”     


새 한 마리가 강가에서 죽어가고 있다.

 키아라는 새에게 다가가 새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려 하지만 고통스러운 새는 입을 벌리지도 못한다. 새를 가슴에 안아주고 새의 눈을 감겨준다. 그러나 여전히 새는 살아있다. 고통스럽게..

순간 키아라는 벌떡 일어나 돌을 들어 새의 머리를 향해 내리친다...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지만 영화 후반 키아라의 죽음을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다.     

나타샤와 일부러 진흙탕에 뒹굴어 집으로 돌아와 아나벨에게 호스를 자신과 개를 씻기도록 한다. 최고급 원피스를 입고 차를 마시던 아나벨은 마지못해 진흙으로 뒤범벅된 키아라의 머리를 감겨주고 개의 몸을 씻긴다. 키아라는 호스를 아나벨을 향해서 그녀의 머리와 옷을 향해 물을 뿌린다. 다소 고의적인 행동이다.          

카아라의 아빠 마티에는 파리에서 살고 있지만 키아라는 이미 죽어 마을 묘지에 묻혔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나벨은 마티에의 무덤을 찾아 마을 묘지로 가는데 묘지기는 그는 죽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다른 여자와 파리에 살고 있다고.. 가끔 딸을 보러 온다고..


마을로 내려가 회전목마를 탄다. 아나벨은 키아라가 말을 타고 빙빙 도는 모습을 바라본다.

40대 중반의 키아라는 8살 때 키아라가 되어있다.

“너무 느려요. 너무... 엄청 느리네요.”

엄마가 해주지 못하고 떠나버린 유년의 미션을 하나하나씩 수행하는 중이다.     

“난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죠. 주의력이 부족해요. 늘 나무만 탔어요. 시험에 낙제하고 최대한 높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죠."


“지금 우리가 여기 나온 거 누가 알고 있지?”

“누구 말이에요?”

“글쎄다.”

아나벨은 키아라가 어떤 금전적 요구를 하기 위해 꿍꿍이를 벌이는 것으로 의심한다.     

엄마의 질문에 격분한 키아라는 술에 취한 채 비틀거리며 생면부지의 남자와 격렬한 춤을 춘다.

술 취한 남자와 술 취한 키아라. 두 사람 사이에 아나벨은 끼어들어 키아라를 그의 몸에서 떼어낸다. 집으로 돌아오고... 연이틀 잠만 자고 일어난 키아라 앞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다

엄마의 밥상........ 얼마나 오랜만인지... 35년 만의 식사

키아라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다가 토하고 통증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를 맞는다.     


이제 약속했던 10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깊은 밤 뜰에서 사진들을 이어 만든 슬라이드 영화를 본다. 일부러 환각성분이 든 차를 엄마에게 권한다... 흐트러짐 없는 아나벨이 긴장을 풀어버리기를... 가슴을 열어 보이기를 바란다.

“내가 왜 떠났는지 알고 싶니?”

“날 떠날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게 늘 궁금했어요."

" 엄마가 떠나기 전 무얼 했는지 기억나요? “

“아니”

“화장을 했어요. 급하게... 그리고 화장품을 식탁에 두고 갔어요.”

“저 사진은 꽤나 통찰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움.. 저게 몇 살 때지.... 사과하고 싶구나,”

“그러지 마요.”

“날 왜 데려온 거지?.. 몸이 좀 이상하구나.. 사진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내가 널 도외줄까?, 며칠 더 있어줄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8살짜리 딸을 버린 여자... 창가에서 늘 엄마를 기다렸지. 8살 때부터.... 늘 지금까지. 술에 취해서.. “          

키아라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주 앉은 아나벨을 향해 술잔을 집어던진다

이마에 피가 흐르고  “아프게 하긴 싫어요....”

      

아나벨과 키아라의 다음날은 눈 덮인 산.. 모노레일을 타는 일정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 환상의 빛... 새하얀 빛. 앞자리에 앉은 키아라는 통증으로 의식을 잃어가는데  뒷좌석의 엄마는 키아라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아나벨은 모처럼만의 여유와 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미소를 짓고 키아라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35년 만에 만난 늙은 엄마의 품에서 마침내 의식을 잃은 키아라. 병원에서 아나벨은 키아라가 시한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비가 내리는데 아나벨은 호미로 땅을 파고 꽃을 심는다.

“캄파눌라야. 어디서든 잘 자라지. ”

아나벨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키아라.     

“이게 네 계획인 거니?"

“계획 같은 건 없어요.”

“여기서 일주일을 보냈지만 아직도 나는 이유를 모른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만 떠나 줘요. 부탁이에요.”

"병원에서 다 들었다. 얼마나 고통스로운지도.."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다가가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말한다.

아나벨의 표정이 경직되고....

“만약 그리하기 싫으면 떠나 줘요.”     

가방을 챙겨 떠나는 아나벨이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아나벨은 파리로 날아가 전남편 마티에를 만난다.

“그분들은 그전부터 날 싫어했어.”

“당신은 반항아, 역마살이 있었지....”

“맞아”

“지금은 정착했어. 35년 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사람이 아닌데..”

“나한테 원한 있어?”

“ 당신이 원하는 건 늘 다른 데에 있었지, 여기 아닌 데를 상상했지. 어떤 기억은 침체되어 있어. 그 침체된 기억은 여전히 우릴 끌고 가. “

“그 애가 내게 부탁했어.”

“그래? 그앨 쉬게 해 줘. 난 못하게 하더라고.”

“내가 떠난 건 더 원했기 때문이야. 난 늘 충분치 않았어.”

“그래.. 그래서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 거지...”          


“키아라... 키아라...”

이미 반쯤 의식을 잃은 키아라가 흙바닥에 누워있다. 충직한 개 나타샤는 끝없이 짖고 있다.      

아나벨은 수레에 키아라를 태워 허둥지둥 강가로 향한다.

키아라가 늘 바라보던 강가.... 새의 죽음이 있었던 강가다.

“마지막으로 힘을 내보렴. 할 수 있겠니?”

“네”

아나벨과 키아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로... 강가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본래 이 세상에 왔던 몸뚱이 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빈 몸으로.......... 나목처럼    

 


“엄마를 이해해요."

“뭘?”

“전부 다요.”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난 두렵지 않아요. 엄마. 쳐다보지 말아요.”     

아나벨은 키아라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돌아온다

불 켜진 오두막... 키아라의 그림자가 있어야 할 방... 불이 켜져 있다.

키아라는 그곳에 없다. 어둠 속... 아나벨은 오래도록 그 방을 바라본다.

          


병으로 고통받는 시한부의 생을... 끝나게 해주는  영화이기에 존엄사나 안락사를 이야기할 때 늘 회자되는 영화라고 한다.     

어미의 자궁을 통해 세상으로 온 아이. 어미의 손에 의해 신의 자궁으로 돌아갔다.

누구든... 생명을 준.... 거대한 자연의 신, 자연의 자궁으로 돌아간다.

지금 몸에 무엇을 걸치고 몇 평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무슨 일을 하며.. 무슨 차를 몰며... 그런 것들은 어느 순간 무의미해진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자연의 자궁은 벌거벗은 몸만이 필요하다.

다시 무기물이 되어... 다시 무언가를 위한 질료가 되어주기를.....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있었던 첫 장면을 다시 떠올린다...     

숲길을 헤매던 키아라의 모습도... 동굴을 들여다보던 아나벨의 모습도...

묘지기가 오래된 관을 해체하여.... 이미 백골 상태가 된 사체를 접어두는 모습도...

썩어버린.... 푸석하게 말라버린... 생명이 빠져나간.... 비어버린 구멍들....

묘지기의 일상을 감독은 왜 이토록 천천히 보여주었을까.  묘지기가 무심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아나벨이 바라본다. 관객인 우리도 바라본다.   덧없음....이었을까...... 

존엄사든 안락사든... 조력죽음이든... 그런 메시지 보다 유난히 가슴이 먹먹했던 장면은 40대의 키아라가 8살 키아라처럼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이었다.

“너무 느려... 너무 느려....”를 연발하면서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은 모성애에 대한 시다. 8살 된 딸을 버리고 떠난 아나벨은 간장 게장 속 어미게와는 다르지만.... 아나벨의 가슴에 어쩌면 평생 상처로..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일요일의 병’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빈 집의 불 켜진 창을 보며 시의 마지막 문구를 떠올렸다.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엄마의 자궁을 빌어 세상에 온 지 8년째 엄마는 급히 화장을 하고 허둥지둥 어디론가 떠나고

아이는 늘 창가에 앉아 엄마를 기다린다. 사춘기를 지나... 숱한 방황과 포기와 좌절을 겪으며..

 떠난 지 35년 만에 만나고.. 10일을 함께 하고  엄마의 손을 빌어 본래의 장소로 돌아간다.

“키아라. 이제 불을 끌 시간이야. 키아라. 고통의 불을, 기다림의 불을, 외로움의 불을, 분노의 불을, 무너짐의 불을.... 그리움의 불을 끌 시간이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작가의 이전글 벽을 보듯 새하얀 종이를 보고 모니터의 화면을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